미국 상장회사의 이사회가 기업인수합병(M&A) 결정에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경영 효율화를 위해 대기업들의 M&A가 크게 늘어나고 있지만 M&A 결정과 진행을 경영진 중심으로 추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사회는 합병비용과 인수조건, 주가산정 등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26일(현지시간) 경영자문회사인 프록시 거버넌스는 이달 말 M&A 최종투표를 앞두고 있는 AT&T와 SBC커뮤니케이션즈, 다음달로 예정된 질레트와 프록트 앤 갬블(P&G)의 합병에서도 이사회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경영진 결정에 고무도장만 찍는 거수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회사 경영진과 소액주주들이 기업 M&A에 큰 기대를 걸며 전폭적인 지지를 하고 있지만 합병 후 경영성과는 시장기대를 크게 밑도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회사 감시자인 이사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실제 SBC에 220억 달러에 인수되는 AT&T의 도널드 맥헨리 이사는 “경영진은 이사회와 충분한 대화를 가지지 않았으며, 이사회가 제시한 협상가격도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며 “나는 기본적으로 이번 합병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일부 월가(街) 분석가들은 AT&T 이사회가 좀더 공격적으로 이번 합병과정에 참여했더라면 SBC가 제시한 주당 5.5%의 프리미엄 가격보다 더 높은 이익을 소액주주들에게 돌려줄 수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P&G에 570억 달러에 인수되는 질레트 이사회도 향후 비즈니스 모델 및 경영전략, 금융현황 등에 대한 기업정보를 제대로 제공 받지 못했으며, 인수회사인 P&G가 분석자료를 내놓은 지 이틀 만에 일사천리로 합병을 승인한 것으로 나타났다.
프록시 거버넌스의 제임스 멜리컨 회장은 “통상 이사회가 M&A 협상에서 ‘노(No)’라고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경영진이 작성한 서류에 별다른 문제 없이 승인도장을 찍는 등 이사회가 눈뜬 장님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