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론] 정부·국회 재정기능 재설정을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 박사는 지난 1980년 발간한 '헌법기초회고록'에서 "국가재정에 관해 나는 나의 지식부족을 통감하였다"고 고백했다. 유 박사는 민주주의와 내각책임제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졌으나 국민의 뜻을 받드는 재정민주주의의 기본 틀에 대해서는 충분한 지식을 가질 수 없었다. 유 박사가 기초한 제헌헌법은 일부 조항을 제외하고는 일본 헌법의 재정조항을 그대로 수용했다. 내각책임제는 행정부의 재정권한이 강한데 그중에서도 일본식 재정제도는 행정부의 재정권한이 특히 강하다. 예산 미집행 사전승인 바람직 결국 우리나라는 행정부와 입법부의 권력이 분립하는 대통령제를 채택하면서도 행정부에 매우 강력한 재정권한을 부여한 셈이 됐다. 재정 운용에 대한 국민의 뜻을 제대로 받들기 위해서는 국회와 행정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63주년 제헌절을 보내며 이러한 근본적인 의문을 생각해본다. 우선 예산과정의 첫 번째 단계인 예산편성에서는 행정부가 독점적인 권한을 보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행정부가 예산 편성을 주도할 필요성은 대통령제와 내각책임제라는 권력구조와 무관하게 인정돼야 한다. 행정부에 재정운용의 책임을 명확하게 부여하는 것이 책임의 분산ㆍ전가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 제4공화국, 1921년 이전의 미국의 경험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의회가 예산 편성을 주도하면 재정은 방만하고 무분별하게 운용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단계인 예산승인은 편성된 예산안에 법적 효력을 부여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의회의 기능이다. 예산승인 과정에서 행정부 예산안을 수정하는 범위는 예산승인 여부를 행정부에 대한 불신임으로 간주하는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르다. 행정부에 대한 의회의 신임이 중시되는 내각책임제에서는 의회의 예산수정 범위가 작을 수밖에 없다. 반면 의회의 정부 예산안 수정을 행정부에 대한 불신임으로 간주하지 않고 의회의 신임과 무관하게 대통령의 임기가 보장되는 대통령제에서는 의회의 예산안 수정범위가 상대적으로 크다. 미국에서는 의회의 예산안 수정범위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고 있으나, 대통령제를 채택하는 다수의 국가에서는 의회의 수정범위에 일정한 제한을 두고 있다. 세 번째 단계인 예산집행은 당연히 행정부의 권한이 돼야 한다. 다만 '행정부는 의회에서 승인된 예산을 반드시 집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내각책임제 국가에서는 예산항목을 '지출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지출이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통령제인 미국에서도 이러한 견해가 채택되고 있는데 행정부가 예산을 집행하지 않을 경우 사전에 의회의 승인을 받도록 하고 있다. 마지막 단계인 사후검사와 평가에서는 의회의 주도적이고도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많은 선진국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결산심사 과정에서 의회가 예산사업과 프로그램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수행되고 있는지를 철저하게 검사해야 한다. 다수의 영국식 내각책임제 국가에서는 위원장을 야당에서 선출하는 공공회계위원회를 설치해 정책의 효과성ㆍ효율성ㆍ적법성 등 그 수행방법을 검증하고 있다. 만약 우리나라가 이러한 제도를 도입한다면 상시적인 국정감사가 이뤄질 것이다. 국회에 공공회계委 설치할만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무상급식ㆍ무상보육ㆍ무상의료 그리고 반값 등록금 등 재정운용에 대한 국민적 갈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또 얼마 전 박희태 국회의장은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행정부의 예산편성권을 국회로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적 재정운용을 위해 행정부와 입법부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가 되고 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