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불안·금융부실 우려 경제안정 위협최근 들어 가계대출이 우리 경제의 큰 골치거리로 등장했다. 이에 따라 정부당국도 가계대출 억제 대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가계대출이 계속 큰 폭으로 증가할 경우 경제안정을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계대출이 꼭 부정적인 영향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대외환경 악화로 수출이 위축되면 국내 소비라도 늘어나야 성장이 가능하다.
이럴 때 가계대출은 소비촉진을 통해 경기를 살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 지난해부터 경기가 회복세로 돌아선 데는 소비지출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경제성장에 대한 소비지출의 기여도는 2000년만해도 43.5%에 불과했으나 지난해에는 70.2%로 높아진데 이어 올 상반기에도 68.7%에 달했다.
하지만 이제는 가계대출이 경제성장에 기여하는 '효자'가 아니라 경제안정을 위협하는 '패륜아'취급을 받고 있다. 가계대출이 너무 많이 늘어 절대적인 부채 규모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계대출 급증은 경제적으로 크게 두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먼저 가계대출 증가와 함께 시중 유동성이 급격하게 늘어 물가불안을 가중시키게 된다. 또 소득이 크게 늘어나지 않는 한 연체율도 높아지면서 금융기관 부실, 나아가 금융시스템 불안을 몰고 올 수 있다.
▶ 6월말 현재 가계부채 400조원
가계대출이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부터다.
가계부채는 2000년말에는 267조원에 달했으나 지난해 말에는 342조원으로 28%나 늘어났다. 올들어서도 가계대출이 큰 폭의 증가세를 보이자 가계부채 잔액은 6월말 현재 397조5,000억원으로 확대됐다.
이처럼 가계부채가 늘어난 것은 무엇보다도 저금리 기조가 이어지는 가운데 기업 대출 수요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대기업들이 부채비율을 줄이기 위해 차입을 최대한 억제하자 은행 등 금융회사들은 가계대출을 늘리는데 주력해 왔다.
일부에서는 가계부채가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국보다 낮아 아직 우려할 수준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국의 가계부채 수준도 사상 최고수준을 기록하고 있어 이런 비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 통화증가 따른 물가불안
가계대출이 늘어나면 통화량도 크게 늘어 물가불안을 자극하게 된다. 개인이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 집을 사게 되면 매도자는 다시 그 돈을 금융상품이나 부동산 등 실물자산에 투자하게 된다. 이런 과정이 계속 되풀이되면 통화량은 큰 폭으로 증가하게 된다.
실제로 한은이 시중 유동성을 측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통화지표인 총유동성(M3)는 8월말 현재 1,100조원을 웃돌았다. 특히 올들어 가계대출이 계속 큰 폭으로 늘어나면서 M3 증가율은 한은이 이상 징후 여부를 판단하는 감시범위(8~12%)를 계속 웃돌고 있다.
통화량이 이렇게 늘어나면 자연스레 물가상승 압력으로 이어진다. 한은이 내년이후의 물가안정을 크게 우려하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 갈수록 높아지는 가계부실 우려
가계대출이 이처럼 크게 늘어나면서 가계부실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소득 수준 등을 고려할 때 부채규모가 지나치게 크게 늘어나기 때문이다.
가계 부채는 이미 보편화된 현상으로 자리잡았다. 한국은행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1인당 평균 대출금액은 3,800만원, 가구당 평균 대출금액은 5,000만원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가구당 연간 가처분소득(2,700만원)보다 두 배 수준에 달한다. 결국 2년동안 번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저축해야 빚을 다 갚을 수 있다는 얘기다.
특히 30대 미만의 차입자 가운데 상당수는 신용도가 낮은 탓에 은행권보다 금리가 높은 할부금융사나 신용카드사로부터 대출을 받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금리가 크게 뛰어오르지 않더라도 지급이자 부담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신용불량자로 전락할 위험도 높은 편이다.
▶ 금융회사 부실 및 금융시스템 불안 가능성
개인이 자신의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파산하면 금융회사의 부실과 이에 따른 금융시스템 불안이 가속화된다.
개인이 빚을 제 때 갚지 못해 금융회사가 부실화될 것이라는 우려는 이미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이미 일부 신용카드사들의 월별 실적은 적자로 돌아섰다.
돈을 빌려준 뒤 제 때 돌려받지 못하는 연체가 늘어나자 수지도 크게 악화되는 추세다. 은행계 카드업체들의 경우 지난해 말만해도 연체율(연체금액/가계대출 잔액)이 7%수준에 머물렀지만 지난 9월에는 11%를 넘어섰다.
연체율 증가는 은행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은행권의 가계대출 연체율도 지난해 말의 1.2%에서 꾸준히 늘어 8월말 현재 1.7%를 웃돌고 있다.
가계대출 잔액이 크게 증가하는 것을 감안할 때 절대적인 연체 규모도 큰 폭으로 늘어나고 있는 셈이다.
연체 증가와 함께 금융회사의 연쇄부실 현상이 빚어지면 금융시스템 자체가 큰 위기를 맞게 될 수 있다. IMF 외환위기가 기업부채에서 비롯됐다면 다음 경제 위기는 개인부채에서 유발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문재기자 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