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목요일 아침에] 개발협력의 현주소

박시룡 <논설실장>

사람들은 잘 잊는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망각속도가 빠르다는 지적을 받는다. 아무리 충격적인 사건이나 사고라도 금새 잊어버린다. 우리 사회에서 비슷한 사건 사고가 되풀이되는 것도 쉽게 잊어버리는 습관 때문에 학습효과가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더구나 나라 안의 일이 아닌 나라 밖의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지구촌의 3대 재앙으로 꼽히는 동남아 해일참사도 점차 희미한 과거지사로 묻히고 있다. 초토화된 피해현장과 피해를 복구할 의지나 힘조차 없어 보이는 피해지역 사람들의 모습이 가끔 TV 뉴스 말미에 비춰지기는 하지만 벌써 관심 밖으로 밀려난 듯하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천재지변으로 졸지에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은 것도 지구촌 재앙의 역사에 남을 일이지만 용케 목숨을 건진 사람들의 절망적인 모습을 쉽게 잊는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자연의 힘 앞에 인간이 얼마나 허약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교훈도 스며 있다. 자연과 더불어 순박하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덮친 자연의 횡포가 원망스럽기도 하다. 실망스럽고 부끄러운 국제감각 뒤늦게나마 천재지변이 몰고온 재앙의 심각성을 깨닫고 세계 각지에서 재건을 도우려는 온정이 답지하고 있는 것은 그나마 위안이다.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많은 나라들이 정부와 민간차원에서 난민과 피해지역의 복구를 발벗고 나서고 있는 데서 국가를 떠나 인간은 지구촌의 동거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특히 호주는 미국ㆍ일본 등 훨씬 잘사는 나라들을 제치고 수억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원조계획을 밝혀 호주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응은 여전히 실망스러웠다. 사태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채널이나 시스템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지만 60만달러를 내놓겠다는 것이 정부의 첫 대응이었다. 그러다가 피해의 실상이 드러나고 우리 국력에 비해 너무 인색하다는 비난이 일자 지원 규모를 여러 차례 늘려나가는 해프닝이 빚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무상원조 5천만달러에 유상원조 2천만달러를 제공하는 것으로 정부차원의 지원 규모가 일단락됐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민간차원의 지원까지 합치면 1억달러는 넘어설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지원 규모가 60만달러에서 1억달러로 늘어나는 과정에는 국제문제에 대한 우리의 수준이 고스란히 배여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미숙한 첫 대응으로 인해 줄 만큼 주고도 빛이 안 나는 꼴이 됐다. 세계시장을 무대로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치고 국제감각이 얼마나 무딘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난 99년 터키 지진사태때도 불과 7만달러를 내놓아 국내외로부터 비난을 받은 적이 있지만 우리의 국제감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사실도 일깨워준다. 경제규모에 걸맞는 지원체제 시급 우리나라는 경제 규모와 수출 규모면에서 세계 10원권을 넘보고 있다. 우리 경제가 어렵다지만 지구촌 전체로 보면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보다 못 사는 나라가 훨씬 많다. 살 길이 바깥에 있다며 세계화 국제화 바람이 분지도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이번 동남아 해일사태에 대한 대응과정은 국제적 위상에 걸맞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시스템과 제도가 마련돼 있지 않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시켜주었다. 지구촌 공동의 과제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얼마나 뒤져 있는지는 정부차원의 연간 공적개발원조 규모(ODA)가 국내총생산(GDP)의 0.1%에도 못미치는 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개발원조 규모가 평균 GDP의 0.3%에 이르는 것과 비교하면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우리나라는 외국의 원조를 받는 수혜국이었다. 이제 우리보다 가난하고 못 사는 나라들을 도울 차례가 됐다. 지구촌의 일원으로서 당연한 의무이기도 하지만 세계를 상대로 수출로 먹고살아야 하는 우리로서는 생존전략으로서의 의미도 있다. ‘세계 속의 한국’을 위한 청사진을 다시 그릴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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