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로 여는 수요일] 만항재


만항재-박현수 作

만항재에서 고한으로 내려오는 버스였다


처녀가 운전기사에게 가서 무어라 속삭였다

귓불까지 빨갛게 달아 있었다

거울에 버스기사의 눈웃음이 얼핏 비치었다

바람 센 길모퉁이에 버스가 멈추었다

처녀는 버스 뒤로 가서


들풀들 사이에 치마를 펼쳐놓고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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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부쟁이며 구절초, 각시취, 엉겅퀴 사이로

익모초 같은 머리카락만 흔들렸다

이윽고 쑥쓰러운 표정으로 처녀가 버스에 올랐다

몸이 단 들꽃 향기도 우르르 올라탔다

버스가 고한버스터미널에 다 와 가건만

남정네들은 처녀의 오줌소리에 푹 빠져서 나오지 못하였다

그때부터 만항재 들꽃에는 오줌냄새가 나곤 했다


난데없이 치마를 둘러쓴 쑥부쟁이며 구절초며 각시취며 엉겅퀴는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끼치자 몸서리도 쳤을 것이다. 하지만 버스가 떠나고 나자 때아닌 횡재에 깔깔깔 웃으며 저물도록 수다를 떨었을 것이다. 처녀가 남기고 간 더운 힘이 복더위 물리치는 보양이 되었을 것이다. 가으내 꽃 색은 더욱 짙고, 향은 멀리 풍기었을 것이다. 비염을 앓던 늙은 멧돼지는 그 향기에 코가 뻥 뚫렸을 것이다.

/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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