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기고] 동리 신재효의 '변강쇠가'

황원갑 <소설가ㆍ한국풍류사연구회장>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는 판소리의 대본인 사설(辭說ㆍ타령) 여섯마당을 집대성해 서민대중의 서사시로 승화시킨 위대한 풍류가객이었다. 판소리는 놀이판의 광대소리에서 비롯돼 농악ㆍ민요ㆍ탈춤 등과 더불어 서민의 애환을 구성지게 엮은 전통 민속예술이다. 신재효가 집대성한 사설 여섯마당은 ‘춘향가’ ‘심청가’ ‘토별가’ ‘흥보가’ ‘적벽가’ ‘변강쇠가’ 등인데 오늘날 판소리 대본의 권위 있는 고전으로 자리잡고 있다. 경제난에 性풍속도 마저 문란 이 가운데서 ‘변강쇠가’는 ‘변강쇠타령’ ‘횡부가’ ‘가루지기타령’이라고도 하며 신재효의 판소리 사설 여섯마당 중 가장 성적표현이 노골적인 작품이며 조선왕조 말기 서민들의 생활풍습을 적나라하게 펼쳐보인 풍속도와도 같은 서민문학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변강쇠가’를 소개하는 까닭은 근래 급격히 사회기강이 문란해지고 이에 따라 건전해야 할 성(性)풍속 또한 너무나 난잡해져 경종을 울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경제난이 가중됨에 따라 가정을 지켜야 할 주부들까지 유흥업소에 나가고 매매춘과 관련한 사건이 끊이지 않는 형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 여대생의 15%가 성병에 걸린 경험이 있다는 조사결과다. 15%가 성경험이 있다고 해도 놀랄 일인데 성병이라니! 여기에 더해 최근 질병관리본부의 조사에 따르면 성병에 걸린 여성의 비율이 2001년 17.6%에서 올해 44.5%로 엄청난 증가세를 보였다는 점이니 그저 놀랄 따름이다. 어쨌든 ‘변강쇠가’는 당대 밑바닥 서민들의 애환을 그린 사설이니만큼 도덕군자들의 훈시와 같이 무미건조하고 고루한 내용은 결코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너무나 성적표현이 노골적이다. ‘변강쇠가’는 이렇게 시작된다. -중년에 맹랑한 일이 있었던 것이었다. 평안도 월경촌에 계집 하나 있으되 얼굴로 볼작시면 춘이월 반개도화 옥빈에 어리었고 초승에 지는 달빛 아미간에 비치었다. 앵도순 고운 입은 빛난 당채 주홍필로 떡 들입다 꾹 찍은 듯, 세류같이 가는 허리 봄바람에 흐늘흐늘…- 이처럼 무대에 처음 등장하는 여주인공이 바로 저 유명한 옹녀인데, 옹녀가 사내 잡아먹기를 밥 먹듯이 하니 마침내 황해도와 평안도 사람들이 모두 들고일어나서 “이년을 그냥 두었다가는 우리 두 도내에 X 단 놈 다시없고 여인국이 되겠다”면서 옹녀의 집을 부수고 타도로 쫓아버렸다. 옹녀가 쫓겨나면서 이렇게 악을 쓰는데 그 소리가 걸작이다. “어허, 인심 흉악하다. 황ㆍ평 양서 아니면 살 데가 없겠느냐. 삼남 X은 더 좋다더라!” 이렇게 쫓겨난 옹녀가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황해도 청석골에 이르렀는데 마침 삼남에서 빌어먹다 북도로 올라오던 천하의 잡놈 변강쇠와 만나게 되었다. 천하의 음녀와 잡놈이 만나기 무섭게 이내 눈이 맞아 함께 살기로 작정하고 산중에서 바로바로 일을 치르는데 그 대목이 ‘변강쇠가’의 압권이다. 그렇게 부부가 된 강쇠와 옹녀는 각지로 돌아다니다가 지리산에 들어가 살게 된다. 하지만 강쇠가 평생 일해본 적이 없는 놈인지라 낮에는 잠만 자고 밤에는 옹녀의 배만 타니 둘 다 굶어죽게 생겼는지라 옹녀가 나무라도 해오라고 시킨다. 강쇠는 엉뚱하게도 장승을 베어와 장작처럼 패어 아궁이에 때고 억울하게 죽은 장승귀신은 노량진 대방장승에게 찾아가 원통함을 하소연한다. 결국 강쇠는 벌떼처럼 달려든 팔도 장승들에게 비명즉사하고 만다. 옹녀가 강쇠의 초상을 치르려고 하나 부르는 사람마다 줄줄이 죽어서 나가자빠져 버린다. 그렇게 늘어난 시체가 무려 여섯 구. 결국 각설이패가 찾아와 시체들을 묻어주고 간다. 사회기강 바로잡을 경종되길 그동안 많은 연구가가 ‘변강쇠가’가 음탕하고 난잡한 성관계를 징계하는 내용으로 풀이했지만 이설도 있다. 즉, 인간의 성욕은 식욕과 더불어 하늘이 내린 천성이라는 사상, 부패무능한 조선왕조 말기의 어지러운 사회상, 그 속에서 간고하게 살아가는 천민들의 애환 등을 그렸다는 것이다. 판소리 사설 여섯마당을 집대성하고 수많은 명창을 길러낸 ‘판소리의 중흥조’ 신재효는 순조 12년(1812)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고을 아전을 지내다가 은퇴하여 73세로 죽을 때까지 판소리 연구에 전념했으며 고종 21년(1884)에 세상을 떴다. 선운산으로 유명한 전북 고창에 가면 그의 옛집인 동리정사와 동리노래비가 있고 그를 추모하여 세운 동리국악당이 고창읍성 앞에 있다. 아무리 세태가 어지럽더라도 인간의 도리를 저버려서는 안된다. 정상적인 사랑은 아름답지만 무분별하고 문란하고 퇴폐적이며 난잡한 성관계는 곤란하다. 그것은 세상을 더욱 혼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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