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치의 계절에 부치는 고언/이준기 시인(기고)

한때 매스컴을 시끄럽게 수놓은 외자 명사가 있다. 다름 아닌 「용」이다. 여당의 대통령후보 경선 출마자를 일컬어 9룡이니 8룡이니 7룡이니 했다. 앞에 붙은 숫자는 출마예상자의 머릿수였다.나날이 신문지문과 TV 화면을 통해 용의 얼굴을 대하면서 많은 국민이 당혹감을 맛보았다. 깊은 생각없이 옛말을 빌어써서 그렇거니, 또는 여당 스스로 「용」이라 부르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는 대범한 사람들도 많았겠지만 일부 지식층은 거부감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설사 그들이 승천을 기약하는 용처럼 대망을 불태운다 해서, 또 그들중 한사람이 그 열망을 달성한다 해서 그가 과연 용안에 가득히 미소를 머금고 용상에 올라 앉는 일이야 없을 것 아닌가. 대통령이 나라를 대표하는 국가원수임엔 틀림 없지만 옛날 임금처럼 「짐이 곧 국가」가 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뜻 있는 이들은 연일 매스컴을 뜨겁게 달구는 「용안」을 대하면서 황송함이나 경의보다는 오히려 씁쓸한 민망함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야 각당의 대선후보가 결정된 이후엔 「용」이란 명사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어느 당에서 「우리 후보가 용이다」라고 하면 그렇게 불러주고 어느 누구도 「내가 용이다」라고 말하지 않으면 불러 주지 않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금이야 말로 대선후보를 용이라 불러 과히 어색하지는 않을 듯도 하다. 각설하고 민주주의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다. 초등학생도 아는 것을 실없이 되뇐다고 타박할 일이 아니다. 주인이 주인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다만 선거때의 한표뿐이다. 선거가 끝나면 그 결과가 어떻든 항상 바지저고리일 뿐이다. 이것은 민주주의 대의정치의 불가피한 맹점이라고도 하지만 후진적 정치풍토에서는 더욱 그렇다. 폐해는 군사정권의 통과의례식 선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뽑힌 사람」이 「뽑은 사람들」을 가볍게 여기는 후진국에서는 과연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가조차 가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무릇 현자는 대의를 믿어보지만 소인은 눈 앞의 작은 이부터 챙기는 법이다. 「뽑힌 사람」이 자기성취감에 도취하여 권력의 마술에 탐닉하다보면 과연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조차 잊고 마는 것이 아닐까. 권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휘두르기 알맞은 보검이 아니다. 무겁고 힘겨운 짐일 뿐이다. 인간성이 올바르게 형성된 사람에게 있어서는 권력이 즐거움이나 자랑스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임에 다름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부족한 존재다. 따지고 본다면 누가 누구를 통치한다는 자체가 모순일 수 있다. 아무리 두뇌가 명석하고 경륜이 탁월하다 해도 두려움을 극복할 용기와 무거운 짐을 나를 힘 없이는 정치에 덤벼들 일이 아니다. 플라톤은 「통치자는 마땅히 철학자라야 하며 그가 진정한 철학자라면 자신의 욕망과 관계없이 통치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오늘날 각국의 국가원수가 모두 철학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플라톤의 경구는 되씹어 보아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굳이 플라톤의 않는다 하더라도 권력자의 자리에 오르려는 사람의 덕목 제1조는 스스로를 아는 지혜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의 실정은 전혀 그렇지 못한 듯하다. 정치판을 주름잡는 이들의 도덕성은 대체로 양심적인 범부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단언해도 결코 지나친 폄하는 아닐 것이다. 으레 정치판은 그럴 수밖에 없다는 자기합리화의 억지논리가 체질화한 느낌이다. 소위 「풀뿌리 민주주의」를 외치며 출범한 지방의회를 보아도 정치의 오염이 얼마나 가공스런 것인지 쉽게 짐작할만 하다. 경제가 어렵고 과소비풍조가 망국적현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걱정속에서도 주민의 세금을 빼내어 호화외유를 서슴지 않는다. 더 높은 자리에는 각성이 있을까. 더하면 더하지 그에 뒤지지는 않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그들을 싸잡아 질책하려는 의도는 없다. 더 큰 문제는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가을바람과 함께 대선열기가 차츰 도를 더한다. 운명의 시간이 한발짝 다가오는 것이다. 방법을 안가리고 뽑히고 보자는 그릇된 욕망의 사슬이 대선까지 옥죄고 있다면 참으로 큰 일이다. 술수와 이합집산으로 얼룩진 파당정치, 보스정치는 이제 깨뜨릴때가 되었다. 떳떳하지 못한 정치판에서 때에 절었다해서 정치9단이 될 수 없고 약속과 신의를 헌신짝처럼 저버릴 땐 비록 새얼굴이라 해서 참신할 수 없다. 나아갈 때 나아가고 물러설 때 물러설 줄 아는 것은 병법의 차원이 아니라, 권력을 지향하는 자는 그렇지 않는 사람보다 몇배 몇십배 겸허해야 마땅하다. 권력의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고 형극의 길이라는 자기확신을 이끌어 내지 않으면 않된다. 왜 나는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가. 스스로를 향해 묻고 또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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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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