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2(화) 19:07
지난 6월10일, 정부과천청사 재정경제부 회의실.
재경부와 산업자원부, 농림부, 건설교통부 등 경제부처 차관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산자부 차관이 기다렸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국제통화기금 체제이후 내수기반이 붕괴되고 있습니다. 수출도 기대했던 만큼 형편이 좋지는 않습니다. 이러다간 제조업 전체가 무너질 겁니다. 일부 업종에 대해서만이라도 경기부양책을 써야 합니다.』
그러나 모두 묵묵부답이었다. 산자부차관은 더욱 목소리를 높여 경기를 부양해야 하는 근거를 설명했다.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경기부양이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동차나 가전산업의 경우 이대로 두었다가는 수천여 협력업체나 대리점 등으로 피해가 확산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별소비세를 인하하는 등 대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합니다..』
이에 재경부 당국자가 짜증스러운 투의 목소리로 한마디를 던졌다.
『정책을 매크로하게(거시적으로) 봐야지, 그렇게 보면 안됩니다.』
이 한마디에 회의장은 얼어붙었다. 재경부는 산자부가 안건으로 제출했던 제한적 경기부양책과 중소기업에 대한 정책자금 지원, 무역금융 지원문제를 덮고 다음 안건을 진행하자고 제의했다. 그러자 보다못한 농림부차관이 산자부 편을 들고 나섰다. 『산자부 얘기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조금더 들어 봅시다.』이후 지루한 설전이 이어졌다. 마라톤회의로 이어졌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나흘 뒤인 6월14일. 산자부 관계자들은 이규성(李揆成) 재경부장관을 만나 직접 설득하기로 했다. 일부 실무자들이 이를 보고하자 박태영(朴泰榮)장관까지 직접 나서 재경부 장관실로 향했다. 그러나 산자부의 재경부 설득작업은 또다시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재경부 당국자들이 『경기부양이나 무역금융은 매크로적 측면에서 수용하기 힘든데다 국제통화기금(IMF)의 동의를 얻기 힘들다』며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다. 재경부 당국자는 이날 설전이 끝난 뒤 기자실에 들러 『산자부 사람들에게 금융이 뭔지 가르쳐줬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산업자원부 사람들은 며칠 뒤 IMF 서울사무소 직원들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재경부가 곤란한 일이 생기면 IMF핑계를 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산자부 관리들이 『수출이 어려운데 제한적으로 무역금융을 지원해도 되겠느냐』고 물으니 IMF 사람들의 대답은 『왜 안되겠는가. 그런 것까지 우리에게 물어야 하는가』였다.
어느 나라 재정경제부인지 답답한 일이다. 도탄에 빠진 나라경제를 살릴 수 있는 한줄기 빛이라도 있다면 기를 쓰고 찾아야할 터인데 IMF와 매크로타령이다.
재정경제부, 우리나라 경제정책을 수립하는 핵심부처다. 지난 정부에서는 경제기획원으로 금융과 예산, 조세정책을 관장했다.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막강한 파워를 자랑했다. 관료들도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산업현장을 잘 모른다. 이론에만 밝지 현실에는 어둡다는 지적이다.
경제를 거시적으로 보는 것은 옳다. 그러나 숲만보고 나무를 보지 못하는 것은 절름발이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정부가 내놓은 증권시장이나, 경기부양책은 항상 뒷북을 치기 일쑤다. 경제기획원 시절부터 『실물경기가 어렵다. 기업들을 살려야 한다』는 주장만 나오면 이들은 『매크로를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하느냐』며 반박한다.
88서울 올림픽 이후 2년 연속 무역흑자가 나자, 이들 매크로주의자는 『무역수지 흑자가 나는 것도 문제다. 이제는 원화가치를 평가절상시켜 균형 수준에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도체 특수로 거품경기가 이어졌던 지난 정부에서도 이들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면서 「우리도 이제는 선진국 문턱에 왔다」며 자화자찬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금융과 세제란 옥쇄를 차고 앉아 호령해온 매크로공무원들은 IMF체제속에서도 좀처럼 변하지 않고 있다. IMF와 단독창구를 확보해놓고 다른 부처는 얼씬도 못하게 한다. 기업들이 요청하는 지원책은 IMF를 핑계대며 거부한다.
익명을 요구한 산자부 고위 관계자는 『재경부가 IMF의 업무를 아직껏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꼬집는다. 『무역금융의 경우 우리가 수출을 많이 해야 외채를 갚을 수 있다는 점을 IMF도 익히 알고 있는데 미리 반대할 것이라고 겁먹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5대그룹에 대한 무역금융지원문제에서 IMF가 꺼리는 것은 자금의 편중이지, 무역금융 자체가 아니라는 점을 재경부가 모르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전문가들은 매크로와 실물경제를 제대로 결합시켜 정책을 구사해야만 지금의 경제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산업연구원 정책연구센터 김용렬(金龍烈) 연구위원은 『재경부가 표방하는 메커니즘이 논리적인 부분도 있지만 이를 실물현장과 연결시켜주기 위해서는 사안별로 부처간 위원회조직을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한다. 부처간 시각차나 정책목표를 조화시키기 위해 위원회나 공동대응기구를 구성해 구속력을 갖고 시행토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스코경영연구소 강구영(姜求永)정책기획실장은 「리더십」에서 해법을 찾아야한다고 제안했다.姜실장은 『청와대나 총리실이 사안별로 정책목표를 명확히 정해 각 부처들의 정책을 조합하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원론에만 집착하는 타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경제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미시적 측면에서 찾아야 하며 IMF의 지나친 거시경제안정중심프로그램은 자칫 경제를 더 악화시킬 수 있는 지적을 재정경제부는 귀담아 들어야 한다.
산업부 산업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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