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치와 회계투명성

`정치와 회계투명성`은 역시 가장 안 어울리는 한 쌍인가. 10억원 단위면 깨끗한 축에 들어간다는 말이 먹혀드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선거철이 되면 우리나라 대기업 오너들은 대거 외유에 나선다. 국내에 남아 돈을 달라는 정치권의 등쌀을 견디기 어렵고 후유증도 두렵기 때문이다. 불과 30, 40년 전만 해도 어지간한 기업에는 심심찮게 깡패들이 찾아와 돈을 뜯어갔다. 지금은 조직폭력배라고 해도 기업에 돈을 내놓으라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비영리단체들도 수시로 기부금을 요청하지만 최종 결정은 기업의 몫이다. 그러나 유독 정치권만은 아직도 정부가 관련된 거의 모든 거래에서 검은손 역할을 하고 있다. 거액의 대출이나 만기 연장, 정부투자ㆍ출자기관의 민영화, 관급공사계약, 대규모의 구매계약, 신규 사업자 선정, 법정관리ㆍ화의ㆍ출자전환 및 공적자금 투입의 이면에 정치권력의 개입과 로비가 있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한국에서 기업의 생존 룰과 성장 룰은 비자금ㆍ정치자금을 이권 또는 더 큰 금액의 금융과 맞바꾸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D그룹과 H그룹의 유동성 문제해결에 정치권력이 개입되면서 우리 국민들이 추가로 부담한 공적자금이 적어도 20조원은 넘었을 것이라는 추측에 대해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면서도 정부와 정치권은 기업에 대해서는 경제력 집중과 기업지배구조 개선, 회계투명성 확보를 위한 내부통제제도의 구축 및 외부감사제도의 개혁 등을 끊임없이 요구해왔다. 그 덕분에 우리나라 대표기업들의 투명성과 신뢰성은 몰라보게 달라지고 있다. SK그룹의 비자금도 국내에서 조달한 돈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대규모의 비자금 조성이 그만큼 어려워진 탓일 것이다. 문제는 기업 외부의 환경이다. 기업의 생존이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정치권력이 기업에 비자금을 강요하면 기업은 이를 거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은 시장의 힘이 강해져 엉터리 기업이 정치권력의 힘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지만 아직도 정치권은 멀쩡한 기업을 괴롭혀 어려운 지경에 빠뜨리거나 기업주 개인의 신상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정도의 힘은 갖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경영과 회계투명성은 투명한 기업환경 없이는, 특히 부정한 정치자금ㆍ비자금이 근절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다. 정치인은 선거를 통해 국민들이 공인한 입법과 행정감시의 전문가다. 대표적인 전문직업인인 변호사ㆍ의사ㆍ공인회계사에게는 높은 윤리성ㆍ전문성ㆍ독립성이 필수요건이다. 선진국의 금융계에는 엄격한 적격성(fit & proper) 심사에 통과한 전문가만 종사할 수 있으며 비윤리적인 행위를 하면 영원히 추방된다. 선진국의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부패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정치인들은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바탕으로 온갖 특권을 누리고 있지만 이러한 신분적 특권에는 반드시 엄격한 책무가 수반돼야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연구에서 리더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정직성이었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정직하지 않은 정치인들이 끈질기게 살아남아 국민들을 속여왔고 또 국민 위에 군림해왔다. 정치의 투명성 확보에 필요한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첫째, 각 정당이 정치자금 등의 관리에 필요한 내부통제시스템을 의무화하고 매년 내부통제의 신뢰성과 재무보고서(중앙당ㆍ지구당ㆍ후원회 및 국회의원)에 대해 정당 대표, 재정책임자와 국회의원 본인의 확인서를 받는다. 둘째, 상기 보고서는 선거관리위원회가 지정한 회계법인 또는 독립성과 신뢰성이 확보된 공공감사단이 외부감사를 실시하고 감사결과는 선거관리위원회에 직접 보고한 뒤 즉시 공개한다. 셋째, 기업의 정치자금은 장기적으로는 금지해야 하지만 잠정적으로 선거관리위원회를 통해서만 납부하도록 하고 금액한도를 둬야 한다. 미국에서는 기업, 노동조합, 국립은행, 정부와 계약관계가 있는 자, 외국인, 다른 사람 명의, 100달러를 초과하는 현금, 미성년자와 소프트머니의 기부가 금지돼 있다. 넷째, 선거관리위원회의 사후관리 권한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하늘의 도움을 받아 지금까지 기적적으로 버텨왔지만 정치의 투명성 없이는 국가발전이나 선진국 진입은 결코 이룰 수 없다. 한국정치의 기적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점이다. <김일섭(이화여대 경영부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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