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발언대] '88만원 세대'

최근 우석훈 성공회대 교수가 이름을 붙인 ‘88만원세대’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좌파 특유의 ‘전복적 상상력’과 ‘장인적 섬세함’이라는 두 가지 능력이 결합한 데서 비롯된 폭발력이 매력인 것 같다. 그래서 가끔 책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의 ‘88만원 세대’ 라는 책에 대해서도 담소를 나누게 된다. 그 과정에서 ‘88만원세대’라는 명칭 붙이기와 문제의식에 여러 지식인들이 매료되는 데 반해 묘하게도 젊은 20대 당사자들은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그 이유의 일부는 그 책이 20대가 가진 근사한 직장과 정규직에 대한 열망, 생계의 곤궁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의 구조적 한계를 지적하면서 일말의 기대감마저 꺾어놓기 때문이고 또 책을 읽으면서 ‘나라도 더 열심히 해서 비정규직이라는 88만원세대 호칭에서 벗어나자’는 열망을 더 자극 받기 때문이다. 약간 아프면 ‘아프다’고 말 할 수 있지만 너무 아픈 사람은 그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혼자 앓는다. 누군가 ‘당신은 아픈 사람이고 이대로는 안 된다’고 말한다면 그는 화를 낼까 아니면 고마워할까. 아니다. 비유가 적절치 않다면 다시 물어보자. 내가 취업 준비중인 사람이라면 어떡하든 경쟁을 뚫고 올라가 정규직의 타이틀을 쥐려고 할 것인가 아니면 박봉의 생활협동조합에서 일하며 새로운 가치 실현이라는 대안적 삶을 기쁘게 향유할 것인가. 아니 이 질문도 좀 부족하다. 아픈 것과 아픔을 흉내내보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아프지 않은 나는 기껏해야 그 책을 읽고서 애용하던 대형할인점을 이용하지 않기로 하고 관심 없던 생협에 긍정적 관심이 좀 생기고 지난 정권에 대한 애매했던 태도가 다소 분명해지는 정도인 것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에서 ‘인간이라는 불편한 가면’을 벗고자 하는 신자유주의가 노골화된 세상에서 더불어 세대착취라는 처참한 경쟁에 내몰린 젊은 세대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88만원세대’는 보이지 않는 공동체에 이름 붙이기의 일환이다. 가령 한국 노동자의 노동조건 개선이란 말에는 더 소외된 외국인 이주노동자가 빠지기 마련이다. 더 소외된 자들은 이름마저 없다. 그래서 ‘88만원세대’는 아픈 이름이고 그 이름에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진리적 요소가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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