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9월8일] 아듀, 뉴암스테르담


1664년 9월8일 뉴암스테르담에 비상이 걸렸다. 영국군의 침공 때문이다. 네덜란드의 대응책은 지연전. 맨해튼 북단에 설치한 목책(Wall)에 의지해 구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심산이었다. 계산은 완전 빗나갔다. 천혜의 요새라고 믿었던 맨해튼 남단을 넘어 영국이 쳐들어왔기 때문. 총독은 결사항전을 다짐했지만 시민들의 생각은 달랐다. 모피와 사탕수수ㆍ노예무역을 통해 짭짤한 이익을 누리던 터. 애국심보다는 재산을 지키고 싶었던 상인들은 항복을 재촉했다. 총독의 동생까지 상인 편을 들었다. 무혈입성한 영국군 뒤로 네덜란드 수비대는 본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초대 총독 미뉴이트가 1624년 인디언 추장에게 구슬과 도끼 등 60길더(24달러)어치 물건을 주고 맨해튼 섬을 통째로 사들인 지 40년. 네덜란드는 알짜배기 섬을 영국에 빼앗겼다. 영국은 점령지의 현실에 놀랐다. 닻을 내리면 교회부터 세우는 영국인 정착촌과 달리 예배당 하나 없었다. 인종 구성도 잡다했다. 기피 인종이던 유대인도 득실거렸다. 통용되는 언어만 18개. 발달한 것이라고는 상거래와 무역과 금융뿐이었다. 영국은 문화 이식을 포기하고 섬의 통치를 자율에 맡겼다. 이름이 뉴욕으로 변경(1669년)되고, 네덜란드가 탈환해 뉴오렌지로 다시 바뀌는 와중에서도 돈과 물질을 밝히는 맨해튼의 특성은 그대로 이어졌다. 영국과 네덜란드간 세 차례의 전쟁을 마무리한 웨스트민스터 조약으로 소유권이 완전히 영국에 귀착된 1673년 이후 뉴욕은 본격적인 성장기에 접어들었다. 번영의 핵심은 월스트리트. 방어용 목책을 따라 병력 이동통로로 남겨둔 공터에 무역상과 금융업자가 모여들어 성장을 이끌었다. 탄생기부터 뉴욕의 역사는 두 단어로 쓰여졌다. ‘돈과 탐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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