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월24일] 골드 러시

[오늘의 경제소사/1월24일] 골드 러시 권홍우 1948년 1월24일 미국 새크라멘토 강기슭, 요한 수터의 사무실. 수석 기술자 마셜이 낟알 모양의 노란 금속을 꺼냈다. “금(金)입니다.” 수터는 미간을 찌푸렸다. 애써 마련한 터전 ‘뉴 헬베티아(새로운 스위스: 1만2,000마리의 소, 제분공장ㆍ제재소 등 건물 60개동을 갖춰 수터의 요새로도 불렸다)’의 안정이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려는 현실로 찾아왔다. 임금을 두 배로 올려주며 함구령을 내렸지만 인근 가게 주인의 입에 의해 소문이 퍼졌다. 지역이 들끓고 학교가 문을 닫았다. 교사나 학생 모두가 금을 캐러 떠났다. 본격적인 골드러시는 1849년부터. 제임스 포크 대통령의 ‘금광 발견’ 발표에 서부를 향한 대열이 꼬리를 물었다. 대박을 찾아 캘리포니아에 모인 10만명의 ‘49ers(포티나이너스)’에는 혁명을 피하려던 프랑스인 2만5,000명과 중국인 2만명도 끼어 있었다. 1만5,000명이던 캘리포니아 인구는 1852년 25만명으로 불어났다. ‘포티나이너스’는 지금도 미식축구팀 이름으로 남아 있다. 콜로라도와 몬태나로 번진 골드러시는 서부개척을 앞당겼다. 1867년 대륙횡단 철도가 완공되고 자본가들은 광물자원 개발에 돈을 쏟았다. 철도를 깔기 위한 철강공장과 석유시설이 중서부에 세워져 미국은 광대한 국토를 고루 발전시킨 최초의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금광의 존재도 모르고 캘리포니아를 미국에 뺏긴(1848.2.2) 멕시코의 한탄과 삶의 터전을 앗긴 인디언들의 회한은 역사의 뒷장일 뿐이다. 골드러시는 재연되고 있다. 고유가와 금값 상승, 통화가치 불안 속에 세계 각국은 지난해 금광 개발에 23억달러를 투자했다. 대박 경쟁에서 생존 레이스로 변모한 골드러시 기류에 한국의 좌표는 어디쯤일까. 입력시간 : 2006/01/2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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