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와 달리 꾸준한 성장… EU 대응능력도 업그레이드
"큰 영향은 없을 것" 전망도
국제채권단의 구제금융안에 대한 찬반을 묻는 그리스 국민투표에서 반대표가 압도적으로 승리하면서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Grexit)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유럽의 진짜 걱정은 그렉시트 자체가 아니라 사태가 유럽 통합에 미칠 후폭풍이다. 이에 따라 유럽연합(EU)을 이끌고 있는 독일과 프랑스는 그리스 사태가 스페인·포르투갈 등 남유럽 전반으로 확산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긴축정책에 불만을 품어온 남유럽 국가에서 또다시 좌파 정당들이 득세하고 '제2의 치프라스'가 잇달아 등장할 경우 '하나의 유럽'은 고사하고 유로존과 유로화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우려는 기우에 그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포르투갈·스페인·이탈리아 등은 지난 재정위기 이후 꾸준한 개혁으로 경제 체력을 길러왔고 위기대응 능력을 키운 유로존도 그리스 사태가 더 확산되도록 방치하지 않을 것으로 보여 그리스 사태의 파급력은 예상보다 크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유로화가 실패하면 유럽도 실패한다"며 그리스를 달래고 EU 통합을 위해 총력을 다했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가장 불안하게 하는 요인은 최근 부쩍 세를 키우고 있는 남유럽 좌파 세력들이다. 올 10월 총선을 앞둔 포르투갈에서는 그리스의 시리자(급진좌파연합)와 닮은 사회당이 여론조사에서 앞서며 집권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긴축 반대, 세금 감면 등을 주장하는 사회당이 집권해 채권단과의 재정개혁 약속을 어긴다면 그리스의 전철을 그대로 따라갈 가능성이 크다.
스페인에서는 37세의 젊은 좌파 정치인 파블로 이글레시아스가 '제2의 치프라스'로 부상하고 있다. 창당 4개월 만에 스페인 제3정당으로 급부상한 포데모스를 이끌고 있는 이글레시아스는 '긴축 반대'를 강력하게 외치며 오는 12월 총선 승리 시 부채상환 조건을 바꾸는 등 채무경감을 추진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실업률이 높은 스페인에서 이글레시아스는 청년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급속도로 세를 확장하고 있다.
남유럽 최대 경제대국인 이탈리아에서도 반긴축 바람이 거세다. 지난 5월 지방선거에서 반EU·채무탕감 등을 내세운 베페 그릴로의 '5성 운동'이 집권 민주당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특히 이탈리아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이 유럽에서 그리스 다음으로 높아 그릴로가 이끄는 좌파 정당의 지지율은 갈수록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앞서 그리스 경제학자 젠스 바스티안은 그리스 위기가 남유럽으로 전이될 것을 우려하며 "현재의 그리스는 스페인·포르투갈·이탈리아 등의 나라에서 앞으로 벌어질 일의 전조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 그렉시트가 현실화하더라도 남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 확대와 유로존 이탈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포르투갈·이탈리아 등은 과거 재정위기 이후 적극적인 개혁으로 더디지만 꾸준한 성장을 이어가고 있고 EU의 위기대응 능력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는 게 이유다. 5일(현지시간) 블룸버그에 따르면 시장전문가들은 올해 스페인의 경제성장률이 2.0∼2.9% 정도 될 것으로 내다봤으며 포르투갈도 다른 EU 선진국 수준인 2.0% 수준의 성장률을 올릴 것으로 전망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올해 스페인이 3.1%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진단했다.
루이스 데 귄도스 스페인 재무장관은 "스페인의 경제 성장률, 경쟁력, 재정과 은행 상황 등을 고려할 때 지금보다 더 잘 대비하고 있었던 적이 없었다"며 "그렉시트에 대처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루이 마셰트 포르투갈 외무장관도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가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포르투갈에 비극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차례 위기를 겪은 후 강화된 유럽의 위기대응 능력도 위험 전이 가능성을 낮추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대규모 양적완화 정책을 펼치는 한편 남유럽 국가들의 국채를 매입해 최종 대출자 역할을 하면서 위험을 크게 줄이고 있다. 유로안정화기구(ESM)도 회원국들의 재정위기에 대비하고 있다. 아울러 그리스 사태가 더 이상 전염되지 않는다면 유로존 경제에서 그리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2% 남짓한 수준으로 큰 부담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