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소회지만 일본 여행은 늘 마음이 편안했다. 일본인의 친절함 덕분이다. 지난주 다녀온 홋카이도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삿포로 국제예술제'가 진행 중인 홋카이도 옛 도청의 기류는 사뭇 달랐다. 북방도서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별도의 전시실이 마련돼 있는 등 행사명이 무색하게 쇼비니즘으로 덧칠된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최근 일본에 사는 지인의 딸이 직장상사로부터 "독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추궁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설마 했는데 그게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극우 성향인 아베 신조 총리의 폐해가 참으로 크다. 그동안 아베를 보면서 섬뜩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 지난해 5월 '731' 숫자가 새겨진 항공자위대 훈련기 조종석에 앉아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활짝 웃는 아베는 영락없는 광인(狂人)의 모습이었다. '731'이라면 2차 세계대전 당시 세균을 통한 인간 생체실험 등으로 악명을 떨쳤던 731부대의 상징 아닌가.
광기는 계산된 것이었다. 아베는 올해 초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중국과 일본의 갈등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과 독일의 관계에 비유하면서 "우발적으로 혹은 부주의로 양국의 충돌이나 분쟁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731 연출은 자국민에게 일본 제국주의의 향수를 자극하려는 노림수였던 셈이다. 아베의 의도는 지난달 일본 내각의 '헌법 해석 변경을 통한 집단적 자위권 행사 결정'으로 구체적 형체를 드러냈다. 이로써 일본은 노골적인 군사 강국화의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중국도 '권력형 비리척결'이라는 새 길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중국 공산당이 저우융캉 전 정치국 상무위원에 대한 조사를 공식화한 것은 일대 사건이다. 상무위원은 처벌하지 않는다는 오랜 불문율을 깨뜨렸다는 점에서 그렇다. 부패를 뿌리 뽑기 위해서라면 파리든 호랑이든 다 때려잡겠다고 한 시진핑 국가주석이 마침내 구시대적 '권력의 카르텔'과 결별을 고한 것이다.
저우융캉의 혐의는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수준이다. 사업체를 운영한 아들 저우빈을 앞세워 석유시추장비 납품에서부터 호화빌라 분양, 수력댐 인프라 사업 등 온갖 이권에 개입했다. 저우 일가가 이런 식으로 긁어모은 돈이 무려 15조원에 달한다. 여성편력도 막장드라마나 다름없다. CCTV 앵커인 선빙과 예잉춘 등 내연녀들과 벌인 저우의 치정행각은 낯이 뜨거울 정도다. 사실 이런 혐의는 지난해부터 공공연히 나돌았다. 그런데도 선뜻 손을 대지 못하고 이제야 조사를 공식화한 것은 그만큼 과거와의 단절이 쉽지 않았다는 얘기다.
일본과 중국이 가보지 않은 길에 들어선 바탕에는 강국(强國) 건설 전략이 깔려 있다. 경제 무기력을 군사력 증강으로 만회하겠다는 것이 아베의 의도라면 시진핑의 결단에는 도덕적 리더십을 공고히 함으로써 중국을 명실상부한 세계 초강국의 반석 위에 올려놓겠다는 야심이 깃들어 있다.
우리도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경제 난제를 풀기 위해 지도에 없는 길을 가겠다"고 천명하면서 경제혁신의 길을 찾고 있다. 소비와 투자침체를 극복하고 성장동력이 왕성한 경제를 만들겠다는 청사진이 제법 화려하다.
하지만 여기에 일본이나 중국과 같은 강국 전략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다. 일본과 중국이 1894년 청일전쟁 120주년과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100주년을 맞은 올해 이 시점에서 강국화 전략에 몰입하는 것은 강자가 지배했던 역사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때 힘이 약해 강자에 굴종했던 우리가 뼈저렸던 아픔에서 교훈을 찾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민족의 허약함이 빚어낸 굴욕의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지금이라도 서둘러 한반도 통일전략과 통일한국의 부국강병책을 새롭게 가다듬어야 한다. hnsj@sed.co.kr
문성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