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기자의 눈/12월 24일] 증권가의 기억상실증?

“원금까지 날렸으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는데 바뀐 것은 하나도 없네요.” 서울 광화문에서 근무하는 직장인 이모(33)씨는 얼마 전 주식형 펀드를 정리하러 갔다가 주가연계증권(ELS) 가입을 권유받았다. 올 한해 펀드로 고통을 겪었던 것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일이었지만 객장 직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주가가 조금만 오르면 연 30% 수익은 그냥 챙길 수 있다”고 그를 유혹했다. 원금을 까먹을 일이 없냐고 묻자 “주가가 반토막이 나지 않는 이상 원금은 보장된다”며 재차 ELS 가입을 부추겼다. 작년 같았으면 별생각 없이 가입했겠지만 주가가 반토막이 나는 것을 눈으로 본 그로서는 올 한해의 악몽을 다시 되새겼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찾아보기 힘들었던 ELS도 이번주 월요일에만 무려 10여개 증권사에서 신규 출시했다. ‘매 6개월마다 조기 상환 기회 부여’ ‘최고 연 40% 수익 추구’ 등 고객을 유혹하는 문구들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증권사들이 실적을 올리기 위해 주가 상품을 파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고객들이 다시 투자에 나서는 것만큼 반가운 일도 없다. 그러나 최근의 반짝 ELS 열풍은 왠지 모르게 입맛이 쓰다. 국내 ELS 시장은 사실상 외국계 투자은행(IB)들의 잔칫상이었다. 외국계 IB가 설계한 ELS를 국내에 떼다 파는 이른바 ‘백투백’ 헤지 방식 판매가 80%에 육박하면서 지난 9월 월가 IB들이 줄줄이 쓰러질 때 국내 ELS 상당수가 위험에 노출됐었다. 투자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월가의 위험 익스포저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주가가 반토막만 안 나면 원금은 지킨다”고 큰소리쳤지만 그 주식들 상당수는 올 하락장에서 여지없이 반토막이 났고 정기예금의 대안격으로 돈을 맡긴 투자자들은 원금 손실에 한숨을 쉬어야만 했다. 이런 ‘사고’를 겪으면서도 증권사에서 제대로 된 사과를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금융감독원의 불완전 판매 제재 방침에 “그렇게 되면 국내 증권업계의 경쟁력이 약화된다”는 볼멘소리만 늘어놓았다. 그리고 최근 한달 반짝 장세로 모든 게 해결됐다는 듯이 또다시 새로운 상품들을 찍어내기에 여념이 없다. 국내 증권업계는 집단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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