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과 소송을 앞두고 공세를 거듭해온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가 이번에는 "삼성그룹의 지배구조 개편 필요성을 인지하고 이를 지지한다"고 밝히면서 한발 물러섰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 불공정하다는 입장에는 변화가 없지만, 지배구조 재편을 위한 양사의 합병 자체는 지지한다고 밝혀 합병을 무산할 의도는 없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인정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엘리엇이 판을 뒤엎기는 어렵게 됐다고 보고 이후 다양한 상황 전개에 대비해 '운신의 폭'을 미리 넓히겠다는 전략을 수립한 것으로 보인다"며 "엘리엇 입장에서는 공격과 수비 양면으로 활용할 수 있는 다용도 카드"라고 설명했다.
재계에서는 먼저 엘리엇이 합병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의사를 드러낸 데 주목하고 있다.
엘리엇은 그동안 네 차례에 걸쳐 공식 보도자료를 내면서 합병비율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지만 삼성물산·제일모직의 합병 필요성 자체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증권가를 중심으로 합병 무산설이 돌면서 삼성물산의 주가가 떨어지자 여기에 부담을 느꼈다는 게 재계의 분석이다. 삼성물산의 주가가 저평가돼 합병 비율을 재조정해야 한다는 게 엘리엇의 일관된 논리인데 엘리엇의 공격으로 오히려 삼성물산 주가가 떨어진다면 자가당착의 모순에 빠져 공격의 당위성이 약해진다는 것이다. 더구나 엘리엇 입장에서도 시세차익을 남기는 것이 가장 큰 목표인 만큼 삼성물산 주가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지탱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엘리엇이 다음달 17일 열리는 주주총회에서 합병에 반대표를 던질 우호세력을 끌어들이는 데 실패해 목표를 수정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합병을 무산시키기 어렵다면 합병의 당위성을 재빨리 인정하되 그 과정을 문제 삼는 게 이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최치훈 삼성물산 사장을 비롯한 삼성그룹 수뇌부가 주요 해외 기관투자가들을 연쇄 접촉해 상당한 성과를 내면서 해외 투자가를 '내 편'으로 인식해온 엘리엇의 전략에 금이 갔다는 분석도 나온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주총에서 판세를 뒤집기는 사실상 어려운 상황인 만큼 합병안 통과 이후 소송전에 무게를 싣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엘리엇은 이날 개설한 인터넷사이트(www.fairdealforsct.com)에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관한 엘리엇의 견해'라는 제목의 27쪽 분량의 파워포인트 자료를 올려 이번 합병의 불공정성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했다. 엘리엇은 글로벌 의결권 자문 기구인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에 제출하기 위해 이 자료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이 자료는 동시에 19일 시작되는 엘리엇의 주총 금지 가처분금지 신청 심문에서도 근거 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ISS는 분쟁이 있는 주총 사안에 대한 양측의 설명 자료를 대중에 공개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삼성물산 역시 조만간 설명 자료를 공개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ISS는 양측의 입장을 모두 들어본 이후 오는 7월 초 보고서를 통해 견해를 밝힐 계획이다.
ISS가 어떤 입장을 내놓을지 현재로서는 예단하기 어렵지만 만약 엘리엇에 유리한 내용이 담긴다면 주총 이후 합병안 무효 청구 소송 등에서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게 법조계의 분석이다. 엘리엇은 이날 자료를 통해 "이번 합병 계약은 삼성물산을 저평가한 반면 제일모직 주식의 시장 가치가 고평가됐다는 점에서 불공정하다"는 입장을 되풀이했다.
삼성물산은 이와 관련해 "기업 미래 가치와 주주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합병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