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Culture & Life] 추상화 원로화백 윤명로

10년마다 변화 시도… 그래야 화가도 관객도 지루하지 않죠<br>추상회화·판화부터 겸재예찬까지 "언어의 한계 넘어서자" 잇단 변신<br>실존주의 소설 주인공 그린 '벽B'로 1959년 국전에서 큰 상 받았지만<br>"예술에 서열 없다" 반국전 운동도



‘균열’

‘회화 M10’

그가 태어났을 때는 조국이 없었다. 성도 이름도 모두 일본어로 바뀌었다. 이토 에이기치(伊東英吉)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다녀야만 했던 그는 바로 원로 화백 윤명로(77ㆍ사진)다.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함경북도 길주로 이사를 갔던 소년의 기억 속 유년 시절은 수많은 폭격과 굶주림, 그리고 이분법적인 이념의 대결로 얼룩져 있다. 일제 식민지 시절과 해방, 이념 대결과 분단, 그리고 6ㆍ25전쟁을 겪은 윤명로에게 실존주의는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무장한 인민군이 전주 신작로에 나타났어요. 집 뒤편에 분뇨를 모아놓는 웅덩이가 있었는데 어느 날인가 마을에서 반동으로 낙인 찍힌 유지나 공무원들이 총살돼 웅덩이에 빠져 있더군요. 얼마 후에는 연합군의 탱크가 나타났고 역시 공산주의에 앞장섰던 마을 사람들이 총살을 당해 웅덩이에 처박혀 있었습니다. 전쟁 중에 총을 맞고 죽은 게 아니라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총살을 당한 거지요. 제가 어릴 적 겪은 끔직한 우리 현대사는 개인으로서 인간의 주체적 존재성을 강조하는 실존주의에 빠지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됐던 것 같습니다."


사범학교에 다니던 그는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미대 입학을 결정하고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미대에 입학한다. 입주가정교사와 영화관 간판 페인트 아르바이트로 등록금과 생활비를 충당하며 살았던 고학생은 영양실조로 폐결핵에 걸리기도 했다. 졸업을 앞둔 1959년에는 재학생 참가를 사상 처음 허가했던 대한민국미술대전(이하 '국전')에 유화 작품 '벽B'를 출품해 특선을 하게 된다.

"유화 재료는 너무 비싸 살 엄두도 내지 못했을 때였어요. 가난한 학생은 을지로에서 안료를 구해 공업용 기름에 섞어 그림을 그렸지요. 캔버스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때라 나무를 잘라 프레임을 만들고 마대자루를 구해 캔버스 구색을 겨우 갖췄습니다. 실존주의의 대가 사르트르의 소설 '벽'에 등장하는 사형수를 주인공으로 그린 작품이었는데 의외로 호평을 받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국전은 화가 지망생에게는 유일한 등용문이었던 만큼 저로서는 큰 기회를 만난 거나 마찬가지였지요."

윤 화백은 그러나 스타 작가로서 성공이 보장된 길을 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국전 운동의 선봉에 서 이듬해인 1960년 미술가협회를 창설했다. 10월5일 경복궁미술관에서 열린 국전에 대항하자는 뜻에서 덕수궁 돌담길에서 야외 전시회를 가진 것이다. 방명록에는 김환기ㆍ박수근ㆍ유영국 등 당시 거장들이 방문해 젊은 후배들의 치기를 격려하는 메모도 남겼다고 한다. "아카데믹하게 진행되는 국전 분위기도 거북했지만 예술에 서열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술가에게 상을 준다는 것은 예술을 위해 헌신한 그의 삶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지, 예술적 가치에 서열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반국전 운동의 취지에 공감하고 서울대와 홍대 미대 출신 13명이 모였는데 김종학과 김봉태, 그리고 저 이렇게 세 사람만 지금 살아 있네요(웃음)."

당시 그는 커다란 캔버스 위에 몸의 힘찬 표현을 암시하는 '석기시대'라는 작품을 전시했다. 이후 '원죄B' '회화' '문신' 등 1960년에 제작된 윤명로의 추상 작업들은 부식된 동판, 석회 가루, 은가루, 유화물감 등을 재료로 손가락을 사용해 역동적이며 자유로운 화풍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그 작업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던 '회화 M'과 '회화 M10' 등 두 점은 1963년 파리국제비엔날레에 소개됐는데 각각 덴마크허닝현대미술관과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하고 있다.

1969년 윤 화백은 미국 록펠러장학재단의 지원을 받아 미국 프래트 그래픽센터에서 판화 공부를 할 기회를 얻게 된다. 회화를 전공했던 그가 왜 판화를 선택했을까.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목판화 외에는 찾아볼 수가 없었어요. 국제교류가 본격화되면서 석판이나 동판, 실크스크린 기법도 일부 소개됐지만 일반화되지는 못했던 겁니다. 미술계 일각에서는 설치기법에 대한 관심도 있었지만 평면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설치 작품에 도전하는 것은 스스로 기본을 저버리는 처사라는 생각을 가졌던 거죠."

하지만 그의 미국 유학생활은 채 1년을 넘기지 못한다. 폐결핵으로 군복무 면제 판정을 받았던 그에게 느닷없이 영장이 날라왔던 것. 군 복무(예비군 훈련으로 대체)를 하면서 그는 통치자의 권력, 그리고 그로 인한 사회 규제라는 문제에 천착하면서 '자(Ruler) 연작' 작업에 몰입하게 된다. "측정도구인 자는 인간과 인간의 규범이며 약속입니다. 그런데 때때로 세계는 통치자(Ruler)에 의해 규범이나 약속이 파괴되고는 하지요."

실제 자를 녹여서 작업에 담아내는 등 비회화적 매체를 사용해 붕괴와 변형을 암시했던 1970년대 초반 '자'를 주제로 했던 작업은 '균열' 연작으로 이어진다. 1960년대 격렬했던 표현과 색채를 보여줬던 그의 작품 세계가 미국 유학과 군 복무를 기점으로 기하학적 백색 추상회화로 변한 것. '균열' 연작은 건조하는 과정에서 시간적 차이를 두고 갈라지는 물감과 안료의 화학적 성질을 이용했다. 작가는 사회 규범의 붕괴를 상징적 이미지로 받아들이고 갈라지며 터지는 화학적 현상을 의도적으로 화면 곳곳에 적용한다.

1990년에 윤 화백은 충북 부강에 마련한 대형창고에서 작업하면서 이전 작품과는 차별화되는 새로운 형식과 크기의 작품을 선보였다. 도심을 벗어나 대자연의 한복판에 놓인 작가에게 새로운 창작 욕구가 솟구쳤기 때문이다. 당시 개인전에 내놓은 '익명의 땅(1991년작)'은 길이가 13m에 이르는 대작으로 작가는 미지의 대지에 뛰어든 탐험가처럼 거대한 캔버스 위를 종횡무진 누비면서 원시 자연의 광폭한 생명력을 캔버스 위에 쏟아부었다. 윤명로의 진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00년대 들어 작가는 '겸재예찬' 연작에 심취하게 된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를 창안한 겸재 정선으로부터 받은 영감과 작가 자신을 감싸고 있는 자연에 대한 경외감은 새로운 연작의 중요한 모티브가 됐다. 그의 평창동 작업실은 바위와 나무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는 북한산 형제봉을 뒤로 하고 탁 트인 전망으로 인왕산을 마주하는 빼어난 풍광을 지니고 있다. 사시사철 자연의 변화와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작가는 한국의 자연을 고스란히 화폭에 담아낸 겸재에 대한 오마주(경배)를 담아 '겸재예찬'을 완성한다. 특히 '겸재예찬'은 재료 면에서 이전 시기 작품과도 차별화된다.

작가는 "리넨이나 면천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바탕을 구축합니다. 바인더에 곱게 갠 쇳가루를 재료로 붓과 나이프ㆍ헝겊 등을 사용해 이미지를 그려나가지요. 짙은 회색 철분은 시간이 흐르면서 습도와 공기에 반응해 갈색으로 점점 색이 변하면서 미묘한 색채의 변화를 보여주는 거예요."

10년을 주기로 변화를 시도하는 윤 화백에게 변화가 부담스럽지 않은지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한 가지 방식으로 작업을 하다 보면 나 자신조차 지루함을 느끼게 됩니다. 화가 자신도 이렇게 지루한데 내 그림을 좋아하는 관객들은 얼마나 지루하겠습니까? 그래서 변하는 겁니다. 내 그림을 좋아하고 아끼는 분들을 위해서요."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나라 미술 시장이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미술계에서는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오랜 시간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했던 윤 화백에게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조언을 요청했다. "1950년대 중반 미국 화단을 중심으로 팝아트가 유행하면서 회화가 죽었다는 선언적인 말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회화는 죽지 않고 변신을 거듭하며 여전히 사랑 받고 있어요.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언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술입니다. 그리고 예술의 그러한 정신을 지켜내고 표현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가인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사명감이라고 믿습니다."


He 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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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전북 정읍

▲1960년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1961~1968년 이화여고 교사

▲1968년 홍익대 미술대학 출강

▲1969~1970년 미국 록펠러재단 펠로십 유학

▲1972~2002년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

▲1996년 서울대 미술대학 학장

▲2002년~현재 서울대 미술대학 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대표작 60점 공개… 50년 예술인생 한눈에



■ '윤명로: 정신의 흔적'전

우리나라 현대 추상회화의 대표 작가인 윤명로의 50년 예술 인생을 되돌아보는 '윤명로: 정신의 흔적'전이 오는 6월23일까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다. 1960년대부터 시대별 대표작과 함께 최근에 선보인 대형 회화 등 총 60여점이 공개됐다.

윤 화백의 작품 세계는 크게 10년을 주기로 정리된다. 1960년대에는 격정적인 앵포르멜(비정형) 추상회화들을 선보였다. 1970년대에는 '자'와 '균열' 연작을 통해 독자적인 표현 방식을 찾기 위한 치열한 실험기를 거친다. 인간과 사회구조의 붕괴와 혼동을 갈라짐과 터짐의 물리적인 현상을 통해 표현했다. 1980년대에는 '얼레짓(연을 감는 얼레, 즉 실을 감는 행위)' 연작을 통해 전통적인 사물과 행위를 결합시킨 단어를 화두로 자유로운 신체의 표현력을 회복시킨 경쾌한 느낌의 추상회화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1990년대 윤 화백은 '익명의 땅' 연작을 통해 거대한 자연의 응축된 에너지를 자신의 몸을 도구 삼아 거대한 화폭에 분출시키며 드라마틱한 추상 표현 회화를 선보였다. 2000년대 들어서는 '겸재예찬' 연작을 통해 작가를 둘러싼 자연의 존재를 인식하는 한편 깊은 교감을 통해 세상을 관조하는 여유와 명상, 그리고 충만한 기운을 보여주며 완숙한 추상회화의 경지로 나아간다.

작가는 "겸재예찬 연작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분별없이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 젊은 세대들을 향한 화두"라고 말한다.

3년 전부터는 쇳가루를 대체하는 새로운 재료로 훈색(暈色)을 사용하면서 또다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훈색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 색깔이 변하는 무광택, 무채색의 철분과 달리 물감에 섞인 펄 성분으로 인해 빛을 반사하며 관객의 위치에 따라 미묘하게 변하는 시각적 효과를 선사한다. (02)2188-6000



정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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