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송현칼럼] 쌀 협상 미봉책으론 안된다

현정택 인하대 국제통상학부 교수

지난 92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후보는 농민들의 요구와 국민정서를 고려해 쌀시장을 절대로 개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테이블에서는 국내외 가격차만큼 관세를 매기는 것을 조건으로 모든 농산물의 수입제한을 풀도록 하자는 원칙이 굳어진 상태였다. 다급해진 정부가 농수산부 장관을 비롯한 대표단을 현지에 파견, 막바지 밤샘협상을 했지만 이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쌀 관세화를 10년간 ‘유예’하고 95년에 국내 소비량의 1%만큼의 쌀을 수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2004년까지 4%로 늘린다는 선에서 매듭됐다. 다른 말로 하면 UR 협정에 따라 95년부터 쌀시장이 개방된 것이다. 그런데 정작 더 큰 문제는 이후의 대응과정에서 나타난다. 정부는 국민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UR 협상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국무총리와 농수산부 장관을 해임했다. 그리고 수입된 쌀이 식탁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과자와 같은 가공식품을 만드는 데만 사용케 했다. 이에 따라 일반 국민들이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쌀 수입이 지속돼 올해를 예로 들면 20만톤, 인구의 4%를 차지하는 충청남도에서 일년 내내 먹을 만큼의 분량이 들어왔다. 수입제한조치를 관세로 바꿔야 하는 의무는 면제받은 것이 아니라 단지 일정 기간 유예받은 것에 불과한데 국회에서는 매년 쌀값을 올려 이제는 정해진 관세를 받더라도 수입쌀과 경쟁하기 어려운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문제를 직시해 해결책을 찾기보다 희생양을 만들어 불만을 달래고 파문이 눈에 띄지 않도록 덮어두는 데 10년 동안의 유예기간을 소모한 것이다.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일본은 국내 쌀값을 조금씩 내려 유예기간이 끝나기 전인 99년에 관세화를 실시했고 2001년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한 타이완도 2002년 쌀 관세화를 실시해 이제 세계에서 우리나라만 유예를 고수하고 있는 처지가 됐다. 농민들은 쌀 관세화를 계속 유예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더 나아가 식량의 자급자족을 법제화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애써 일군 논을 갈아엎으면서까지 농민들이 시위를 하는 상황이니 정부도 올해 끝나는 유예기간을 더 늘리기 위해 협상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유예’를 연장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양보’를 해야 한다고 협정에 명시돼 있다. 또한 얼마 동안 연장하기로 합의하더라도 그때 또다시 협상을 해야 하며 한번 물량을 늘리기로 합의하면 그 이후 협상에서는 이를 기초로 수입량을 더 늘리는 문제가 논의된다. 일본과 타이완은 이 부담이 만만치 않다고 여기고 어차피 해야 할 관세화를 유예기간이 종료되기 전에 실시한 것이다. 물론 관세로 전환하는 데도 애로는 많다. 우리나라는 일본ㆍ타이완과 달리 경쟁력 강화를 위한 대책을 소홀히 한 탓에 외국쌀 수입이 허용되는 경우 비록 관세를 물게 하더라도 국내쌀의 입지가 좁아질 우려가 있다. 또한 앞으로 도하개발어젠다 협상에서 관세감축 논의가 계속될 것이므로 관세의 보호효과도 점차 줄어들게 될 것이다. 참으로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쌀은 단순한 식량 이전에 모든 생활의 기본이었다. 월급을 말할 때도, 나라에 세금을 낼 때도 화폐 대신 쓰인 때가 있었으며 쌀농사의 풍년과 흉년이 정치에 대한 척도가 되기도 했다. 쌀은 민족의 문화적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기에 많은 국민들이 농촌과 농업에 대한 강한 애정을 가지고 농민들의 주장에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냉엄한 국제 무역규범이 이러한 우리의 민족정서를 포용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도 깨달아야만 한다. 쌀 문제가 아니더라도 또한 개방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우리의 농촌은 도시에 비해 갈수록 낙후되고 발전에서 뒤처져왔다. 농업의 구조조정을 통해 근본적으로 살길을 마련하기 위해 정부와 국회ㆍ농민이 머리를 맞대고 해법을 찾아야 할 때다. 농민들은 결사항전의 구호를 외치고, 국회는 수매가격에 매달리고, 정부는 관세화 유예가 바로 살길인 것처럼 스스로의 최면에 빠져 몰두하다가 또다시 희생양을 찾아 제사를 지내는 잘못을 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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