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론] 1991년과 2006년의 봄

지난 91년 3월 경기도 하남시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 전날 내린 봄비로 운동장 이곳저곳이 질퍽거렸고 꽃샘추위도 매서웠지만 30년 만에 부활한 지방선거의 열기는 뜨거웠다. 며칠 뒤 치러질 기초의원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은 저마다 지역을 살릴 일꾼이 되겠다며 열변을 토했다. 신문사에 갓 입사해 합동연설회를 취재하던 필자도 들떠 있었다. 언론도 현장 분위기와 후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조목조목 보도하며 자치시대의 개막을 대서특필했다. 그해 6월에는 광역의원 선거가 실시됐고 95년 6월에는 민선단체장 선거가 실시됨으로써 우리나라의 지방자치는 본격적인 막을 올리게 된다. 지방선거 앞두고 잇단 공천비리 그로부터 10년이 넘도록 신문기자로 지방자치 현장을 관찰할 기회가 있었지만 지방의 현실은 암담하고 우울해 보였다. 지방의회는 토호 세력이 장악해버렸고 고삐 풀린 민선단체장의 전횡과 비리는 연일 시빗거리였다. 지역 실정에 맞는 정책을 개발하고 주민 참여와 행정서비스가 개선되는 긍정적인 면도 적지 않았지만 선거 때마다 불거지는 공무원 줄 세우기와 비방ㆍ흑색선전으로 지역마다 오랜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중앙집권적인 의식과 정치 풍토도 도무지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2006년의 봄은 뭔가 달라보였다. 15년 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변화의 흐름이 강하게 느껴졌다. 내로라하는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와 고학력의 전문직 종사자들이 지방으로 발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지방의원에 대한 유급제가 도입되면서 참신한 인물들이 대거 기초의원 후보로 등록해 새 바람을 예고했다. 여기에다 정책선거를 실현하기 위한 매니페스토(Manifestoㆍ참공약 선택하기) 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여야 5당 대표도 이 운동에 동참하겠다며 협약식을 체결하고 학계ㆍ언론계ㆍ시민사회단체도 새로운 선거문화 운동에 불을 지폈다. 그러나 달라진 봄기운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공천 비리가 속속 터져나오면서 찬물을 끼얹었다. 기초의원에게도 정당공천제를 도입함으로써 중앙정치의 폐해가 풀뿌리 생활정치에 고스란히 전가되고 말았다. 후보 난립을 막고 책임정치를 구현할 수 있다는 정당공천제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공천=당선’인 특정 지역에서는 과열 양상을 부채질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최근의 공천 비리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우려는 지역별로 확연한 정당 투표 행태와 지방선거를 대선의 전초전으로 여기는 중앙정치권의 시각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매니페스토 운동 협약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벌써부터 여야간에 비방과 폭로전이 난무하는 것도 이전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정당공천제를 실시하기 위해 서둘러 유급제를 도입하는 바람에 지방의원의 겸직 문제와 회기 제한(80~120일), 연봉 소급 지급 등과 같은 제도적 미비점도 속출하고 있다. 5ㆍ31 지방선거가 정책 경쟁을 통해 살기 좋은 동네를 만드는 생활정치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지방을 중앙정치에 예속시키려는 정치 풍토부터 근본적으로 개선돼야 한다. '중앙에 지방예속' 풍토 개선을 2003년 일본 지방선거에서 매니페스토 운동을 벌인 무소속 후보들이 돌풍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60년대의 이념 투쟁을 거친 뒤 생활정치가 정착돼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전통적인 주민자치조직인 조나이카이(町內會)와 풀뿌리 시민단체가 연대한 마치즈쿠리(まちづくりㆍ마을 만들기 운동)가 활발하다는 점도 거대담론에 치중하는 우리나라 시민 운동의 양상과 차이가 있다. 공천 비리로 2006년의 봄도 암울해 보이지만 그래도 봄은 여전히 우리를 설레게 한다. 이제는 후보들의 공약을 꼼꼼히 따져보고 누가 진정한 일꾼인지 분별해내야 할 때다. 매니페스토 운동이 새로운 선거문화 운동으로 뿌리를 내려 올해는 진정 지방의 봄이 만개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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