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 '공직 머슴론'의 성공조건

20여년전 미국에서 경험한 일이다. 근무지가 뉴욕에서 워싱턴 DC로 바뀌는 바람에 버지니아주 운전면허시험을 치르면서 겪은 감동적인 경험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곳 면허시험장 분위기와 테스트 방식은 한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언제든지 시험장을 방문해 빈자리가 있으면 들어가 필기시험을 보면 즉석에서 합격여부를 알려주고 곧바로 시험장 주변 도로에서 주행 테스트를 통과하면 면허증이 나온다. 그런데 시력검사에서 문제가 생겼다. 그동안 별 지장없이 운전을 하고 다녔는데 나도 모르는 새 시력이 나빠졌던 모양이다. 시험관은 몇번이고 나에게 검사 기회를 주었다. 보기가 딱했는지 밖에 나가 먼산을 바라보고 와서 테스트를 받으라고도 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시력검사를 통과하지 못해 안경을 맞춰쓰고 다시 와야 할 형편이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그 시험관은 나에게 일주일 이내에 안경을 맞춰 쓰겠다고 약속 하면 면허증을 내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고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말도 서툴고 납세자도 아닌 외국인을 믿고 그런 호의를 베푸는 시험관이 고맙기도 하고 그런 유연한 제도와 서비스를 받고 사는 미국사람들이 부럽기도 했다. 선진 공복(公僕)에서 받은 감동 이명박 대통령이 공직사회의 변화를 강도높게 주문해 관심을 모은다. 기획재정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공직자는 국민을 위한 ‘머슴(servant)’이라고 단언했다. 단어 이미지가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지만 선진국의 공복(civil servant)개념을 강조한 것으로 보면 거부감을 가질 이유는 없어 보인다. 근대 시민사회에서 공무원 또는 공직자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공복이고, 대다수 선진국에서는 이런 공복정신이 실천되고 있다. 이 대통령이 공직자의 태도만 바뀌어도 규제의 50%는 해결될수 있다고 강조한데서 ‘머슴’에 담긴 뜻이 짐작된다. 사소하지만 미국의 운전면허 시험관은 이런 공복의 한 예가 아닌가 싶다. 나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풀었다기 보다는 공복으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감동을 받은 것은 그런 일에 익숙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대통령이 공직자에게 주문한 머슴역활론이 현실화될지 아니면 일시적 바람에 그칠지 판다하기는 일러 보인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선진국처럼 공복풍토를 만드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럴리도 없지만 만약 한국의 운전면허시험관이 미국의 운전면허시험관처럼 공복정신을 발휘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하고 상상하면 흥미로운 시나리오들이 펼쳐진다. 우선 안경을 맞춰쓰겠다는 구두 약속을 믿고 면허증을 발급했다면 그는 당장 규정위반이나 직권남용등으로 처벌받게 될 것이다. 설령 그것이 용납됐다하더라도 면허증을 받은 사람이 안경을 맞춰쓰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운전을 하다 사고를 냈을 경우 결과는 너무 뻔하다. 운전자는 단연히 처벌되고 면허증을 내준 시험관도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공복정신을 발휘하기 어렵다. 면허시험관이 주어진 재량권을 부당하게 이용하지 않을 것이란 신뢰가 뒷받침돼야 하고 악용하지 못하도록 시스템을 만드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전시행정 낭비 청산부터 뿌리깊은 관료주의로 비난 받는 우리나라 공무원사회를 선진국처럼 공복으로 변화시키는 일은 경제성장률을 높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 일수 있다. 정치수준이 국민의 의식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듯이 공직사회의 변화는 국민의 수준과도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그러나 정부가 변화지 않으면 이명박 정부가 약속한 ‘국민을 섬기는 정부’, ‘선진화 시대’는 불가능하다. 변화의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다. 예산낭비와 비효율, 유치한 구호와 자화자찬, 전시행정과 실적주의, 부처이기주의와 철밥통, 행정편의주의, 부패와 부조리 등 일상화된 폐습만 청산해도 ‘공직 머슴론’의 절반은 성공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민주화가 됐다지만 작은 권한이라도 쥐었다하면 국민을 훈계하고 간섭하려드는 완장문화의 찌꺼끼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유치한 구호들을 앞세워 자기 미화에 급급한 관공서들도 적지 않다. 개발연대에 고도성장을 이끈 공직사회가 이제 선진화 신화의 주역이 되는 길은 멀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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