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성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소년시절부터 나와는 가장 말이 통하고 뜻이 통하던 아주 성실한 친구였다. 어느 날 그 친구와 둘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들길을 걷다가 밭에서 일하는 노인을 보았다. 얼굴은 온통 주름살 투성이고 얼굴이며 팔다리는 오랜 동안 볕에 타서 검게 변해 있었다. 여윈 몸에 군데군데 기워 입은 삼베 고의 적삼이 몹시 헐거워 보였다.
“저기 봐라.” 나는 노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뭐 말이고. 저 할배 말이가?”
“그래. 나는 저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저래 살아서 뭐하노.”
“와, 뭐가 어때서?”평생 뼈빠지게 농사 지어가 남은 게 뭐고. 저게 사람 사는기가?”
“니는 뭐 별수 있을 것 같나?” 오대성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래. 별수 있다. 나는 우쨌거나 별수 있게 살끼다. 결코 저렇게 살지는 않을끼다.”
“그럼 니는 우예 살낀데?”
“지금은 모르겠다. 하지만 농사 짓는 일말고 다른 일을 할끼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순간 내 마음 속에서는 새로운 무엇인가가 용솟음치는 듯했다. 당시 나는 중학교에 다닐 나이였지만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고 있었다. 중학교는 15㎞나 떨어진 대구 시내에 있었다. 교통편도 좋지 못해 중학교에 다니려면 자취나 하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웬만큼 경제적 여유가 있거나 부모님의 남다른 교육열이 없이는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매일매일 똑같이 되풀이되는 생활이 답답하고 싫었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살 수는 없어.` 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했지만 탈출구는 없었다.
`이렇게 지내다가 어른이 되면 나는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나 자신이 한심했고 앞날이 캄캄하게만 느껴졌다. 사실 말이지 50~60년대 우리나라 농촌은 그야말로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대부분 집집마다 식구는 많고 농토는 적고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보릿고개를 떨쳐 버리지 못할 만큼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마을에는 막걸리 한잔에 취한 어른들의 욕지거리와 싸움이 그칠 새 없었다. 희망이 없는 농사일에 지치고 가슴 속에 쌓인 가난의 한을 풀 길이 없으니 그렇게라도 발산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그런 어른들을 볼 때마다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보기 싫어 고개를 돌렸다. `왜들 저렇게 살까? 저렇게 안 살면 안 되는 걸까?` 그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떠나야 한다. 어디든 농촌이 아닌 곳으로 나가야 한다` 는 생각을 수없이 되풀이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뒤 나는 우여곡절 끝에 고등학교를 마치고 어렵사리 대학에 입학했지만 겨우 1년 다니고 공군에 지원 입대, 군복무를 마치고 1967년2월28일 제대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3월1일 도망치듯 집을 나와 서울로 향했다. 단 하루라도 시골 집에 머물다가는 영영 빠져 나오지 못하리라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대구=김태일기자 tikim@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