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살인도 음주상태라고 선처… 술에 너그러운 법원

심신미약 이유로 형량 절반까지 낮추는 '음주 감경' 적용 판결 6개월간 58건

폭행서 성범죄·살인까지 관용 베풀어

조두순 사건으로 성범죄 감경 없앴지만 판사 재량에 따른 '작량감경'도 잇따라

범죄 전력자 제외 등 명확한 기준 필요


지난해 7월 25일 A(37)씨는 1년 넘게 사귀던 내연녀가 만나주질 않자 소주 2병을 마신 뒤 차를 몰고 내연녀 남편인 B씨를 찾아갔다. B씨는 A씨가 시비를 걸어오자 경찰을 불러 A씨의 음주운전 사실을 전했다. 음주운전 사실을 확인한 경찰관 2명은 A씨를 경찰서로 데려왔다. 일이 꼬이자 화가 난 A씨는 경찰서를 잠시 빠져나와 23㎝ 길이의 과도 3개를 구입한 뒤 곧장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관 한 명의 목을 힘껏 찔렀다. 이어 다른 경찰관을 찌르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A씨는 살인, 살인미수, 특수공무집행방해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법원은 "살인 행위가 계획적이며 죄질이 매우 나쁘다"고 꾸짖었다. 계획 살인은 무기징역에 처할 수 있는 중죄다. 그러나 막상 재판부는 A씨가 알코올 의존 증후군을 갖고 있고 범행 당시 과도한 음주로 심신미약 상태에 있었던 점을 참작해 형량을 35년으로 판결했다.


'만취 상태로 저지른 범죄이니 선처할 필요가 있다'는 판결에 대해 국민들의 생각은 어떨까.

지난 9일 공개된 논문 '주취폭력 범죄의 처벌에 대한 연구'(이원정 경기경찰청 총경)에서 시민의 75,3%는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 상태로 저지른 범죄에 양형을 감경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일반인 4명 중 3명은 '술 먹고 저지른 범죄'에 면죄부를 줘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국민 대다수는 음주 범죄에 너그러워서는 안된다고 판단하고 있지만 법원은 여전히 술에 관대한 판결을 내리고 있다. 서울경제신문이 올해 3월부터 8월까지 최근 6개월간 법원 판결을 조사한 결과 '음주 감경'이 이뤄진 사건은 총 58건이었다. 이 가운데 심신미약감경이 33건, 작량감경이 25건이었다.


심신미약이란 음주나 질병으로 사물을 변별할 능력 등이 미약한 상태를 말한다. 범행 당시 심신미약 상태가 인정되면 형량을 최대 2분의 1까지 낮출 수 있다. 2008년 8세 여자아이를 무자비하게 성폭행한 조두순 판결에 적용됐던 게 바로 심신미약 규정이다. 당시 재판부는 "조두순의 죄질이 매우 나빠 무기징역에 해당하지만 만취 상태로 범행을 저질렀다"며 12년형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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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량감경은 법률에 명시된 감경 규정 외에 판사가 재량껏 형을 깎아줄 수 있도록 한 제도로 한국과 일본에서만 적용하고 있는 독특한 제도다. 판사들은 '술에 취해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점을 피고에 유리한 요소로 고려한다' 는 판단 아래 형량을 낮춘 것이다.

법원이 음주를 고려해 선처해준 58건 가운데 A씨와 같은 살인 사건도 2건 있었다. 강간(미수 포함) 13건, 강제추행 6건 등 성범죄가 총 19건으로 전체 사건의 3분의 1을 차지했고 살인미수(8건), 흉기를 사용한 폭행(7건), 공무집행방해(6건) 등 범행도 음주 감경의 단골 메뉴였다.

특히 성범죄의 경우 조두순 판결 이후 '음주 또는 약물로 인한 심신미약 감경을 적용하지 아니한다'는 법 규정이 생겼다. 하지만 강제 규정이 아니어서 여전히 심신미약이 고려됐다. 법원은 심신미약을 적용하지 않을 때는 작량감경으로 형을 낮춰줬다.

음주 감경이 이뤄진 성범죄 사건엔 14년간 떨어져 살던 친딸이 결혼한다며 찾아오자 술김에 성폭행한 사건, 회사 회식에서 취한 동료 직원을 모텔로 데려가 강간한 사건, 5세 여자아이의 음부를 강제로 만지고 이를 말리는 아이 엄마를 폭행한 사건 등이 있었다.

상습적으로 주취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음주 감경을 시켜주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C씨는 포장마차에서 술을 먹다가 아무 이유 없이 60대 손님의 얼굴을 철제의자로 내리쳐 기소됐다. 법원은 "피고인이 집행 유예기간에 범행을 저질렀고 과거에도 술에 취해 수차례 폭력을 휘두른 사실로 보아 재범 위험성이 크다"면서도 "만취한 상태에서 범행을 한 점은 참작 요소"라는 이율배반적인 판결을 내놨다. 형법상 흉기를 사용한 폭행의 형량은 징역 3년 이상이지만 C씨에게 내려진 형량은 징역 1년에 불과했다.

노명선 성균관대 법학과 교수는 "미국, 일본 등 대다수 국가들은 자발적으로 술을 마신 뒤 저지른 범죄를 감경해주지 않는다"며 "똑같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한 명은 술을 마셨다고 선처해주고 한 명은 술을 안 마셨다고 엄히 처벌하는 게 어떤 정당성이 있는 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한 검찰 관계자는 "음주에 대한 판단이 사실상 개별 판사의 재량에 달려있어 문제가 있다"며 "술을 먹고 저지른 범죄 전력이 있으면 음주 감경을 원칙적으로 배제하는 방식 등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서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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