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넣지 못한 작품들 중 가장 아쉬운 게 1960년대 중반 일본 미술시장에 나왔던 반 고흐의 작품 3점입니다. 50년 전 당시 2,000만엔이었는데 저는 300만엔밖에 없어서 대출을 받으러 갔죠. 은행에서 대출해줄 테니 귀화하라고 하더군요. 그럴 수는 없다고 했고 그때 놓친 고흐의 작품은 아직도 눈에 선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재일교포 이주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자수성가해 수집한 작품들 1만점을 국내 미술관에 기증한 컬렉터 하정웅(75·사딩) 수림문화재단 이사장의 말이다. 그는 현재 세계적 작가로 자리매김한 이우환의 작품 42점을 포함해 미국의 팝아트 작가 앤디 워홀의 '마오', 고흐와 샤갈의 판화 등 미술품 8,000여점을 광주시립미술관·부산시립미술관·영암군립하미술관 등지에 기증했고 국립고궁박물관과 숙명여대 박물관에 각각 영친왕 관련 자료, 무용가 최승희 관련 자료 2,000여점을 기증했다. 이들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수백억원을 웃돈다.
이번에 자신의 50년 미술품 수집 인생을 정리한 자전적 에세이 '날마다 한 걸음(메디치미디어 펴냄)'을 출간한 하 이사장은 "제가 작품을 1만점이나 기증했으니 '큰 부자'로 아시는데 실제는 '작은 부자'이고요, 마음이 남들보다 '큰 부자'일 뿐"이라고 말했다. 겸손하게 표현했지만 하 이사장의 작품 수집에는 역사에 대한 깊은 사명감이 깔려 있다. 집안 형편 때문에 화가의 꿈을 접어야 했던 그는 25세부터 그림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마침 일본이 경제부흥기에 접어든 때였고 사업이 번창해 재력도 확보됐다.
"나는 가난 때문에 그림을 못 그렸지만 동포 작가들은 내가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재일교포 화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수집을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내가 자란 아키타 지방의 우리 집 뒷산에는 식민지 때 강제 징용된 수많은 노동자들이 이름 없이 죽은 무연고 묘지가 잔뜩 있었거든요. 내가 번 돈, 내가 수집한 작품들로 징용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불행한 우리 역사에 대해 기도할 수 있는 곳으로 '미술관'을 짓고자 더 열심히 작품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1993년 무렵 일제 징용 희생자 배상문제가 한일 외교갈등 요인으로 부상하면서 불똥이 튀어 미술관 조성이 불발됐다. 차선책이었지만 1992년에 개관했으나 소장품이 미흡하던 광주시립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하기로 했다. 현재 광주시립미술관 소장품의 65%가량은 그의 기증품으로 구성됐다. 선의의 기증이었건만 속상한 일도 있었다. '재일교포 화가들의 쓰레기 같은 그림들'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것. 당시 기증품에 포함된 이우환의 작품은 현재 수십억원에 거래될 정도지만 20년 전 당시만 해도 사람들이 몰라줬던 까닭이다.
그는 지금도 작품을 수집한다. 언젠가 필요한 곳이 있다면 또 기증하기 위해서다. 광주시립미술관은 그의 이름을 딴 '하정웅미술관'을 별도로 건립할 계획을 추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