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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애플·아마존 등 거대 미국 정보기술(IT) 기업에 주도권을 빼앗긴 유럽에 대해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유럽의 검색엔진 시장을 구글이 압도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다. 유럽 내에 '반구글' 정서가 급속히 확산되는 이면에는 더 이상 미국 IT 기업에 유럽의 자존심을 넘길 수 없다는 절박감이 깔려 있다.
한 전문가는 "유럽이 과거 산업혁명의 영광에 안주한 채 정보·디지털혁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게 뼈아팠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유럽은 지난 1995~2000년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에 대한 투자가 미국보다 20% 이상 적었다. 작게 보일 수도 있는 차이지만 결국 21세기 두 지역 간 경쟁력 격차를 넓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이런 유럽이 최근 새롭게 다시 태어나고 있다. 디지털 산업 육성을 통해 '제2의 산업혁명'을 이루겠다는 청사진이 그것이다. 특히 이들은 전통 주력산업인 제조업에 ICT를 접목하는 방법으로 앞서 나아가는 미국과 뒤따라오는 아시아권 국가 사이에서 생존을 모색 중이다.
◇잇따르는 제조업의 디지털화 물결=ICT 산업에 관한 유럽 국가들의 위기의식과 재도약에 대한 의지는 유럽연합(EU)이 2010년 내놓은 'EU 2020'이라는 신경제정책에 그대로 투영됐다.
오는 2020년까지 유럽 지역 발전 방안 가운데 디지털 의제를 가장 핵심적인 과제 중 하나로 선정하고 매섭게 투자를 퍼붓겠다는 EU의 전략이다. 무엇보다 경제위기를 계기로 그동안 사양산업으로 여겼던 제조업이 오히려 생존력이 가장 강하다는 점을 확인한 뒤부터는 제조업·ICT 융합을 통한 산업 경쟁력 확보에 빠르게 대처하고 있다.
독일이 선두에 섰다. 글로벌 제조업 강국이라는 장점을 활용해 기존 산업에 ICT를 융합하는 '제조업의 디지털화'를 빠르게 이뤄나가고 있다.
실제로 다임러와 BMW는 각각 '카투고(car2go)' '드라이브나우(DriveNow)'라는 카셰어링(자동차 공유) 서비스를 확대 보급하면서 최근 서비스 기업으로 변신했다. 또 폭스바겐 등 상당수 자동차 제조사들이 자동차에 ICT를 총집합한 스마트카 산업을 집중 육성하고 있다.
KOTRA는 2025년 독일 산업분야 내 디지털 관련 부가가치 창출 규모가 지난해보다 11.5% 증가한 2조5,931억유로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KOTRA 프랑크푸르트 무역관의 한 관계자는 "앞으로 산업계에서 디지털 패권경쟁이 더 치열해질 것을 감안하면 한국 기업 역시 ICT 강점을 활용한 혁신 시스템 구축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ICT를 제조업에 적용, 패권을 되찾으려는 시도는 영국·프랑스 등 다른 주요 유럽 국가에서도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프랑스에서는 군수품 제조 철강 기업으로 출발해 2002년부터 ICT 융합을 통한 에너지 관리 기업으로 변신한 슈나이더일렉트릭이 디지털화에 성공한 대표적 제조업체로 꼽힌다. 슈나이더일렉트릭은 전력장비를 통합하는 소프트웨어를 주력제품화하면서 13조원이었던 매출을 10년 만에 29조원까지 끌어올렸다. 이제는 사물인터넷(IoT)을 통해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사업에 포커스를 맞췄다. 피에르 콜 슈나이더일렉트릭 부사장은 "슈나이더의 디지털화 전략은 이제 전력시설·산업·데이터센터·빌딩과 주거공간 제어 등 모든 사업영역을 포괄한다"고 설명했다.
◇제품에서 플랫폼·데이터 중심으로 패러다임 전환=유럽 산업계 종사자들은 제조업의 디지털화 과정에서 데이터를 중심으로 한 서비스로 수익 창구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앞으로 디지털 산업의 핵심 이익은 고객을 제어할 수 있는 데이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덧붙여 이를 통한 플랫폼 구축에도 나서고 있다.
특히 최근 페이스북·구글·아마존·애플 등 글로벌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데이터·네트워크 플랫폼을 장악하고 하드웨어 업체에 대해 압박의 강도를 높여가고 있다. 이제 제조업체들의 패러다임 변화는 생존을 위해 건너야만 하는 외나무다리가 됐다. 독일이 자동차 분야에서 데이터 소유 문제에 눈뜨고 슈나이더일렉트릭과 같은 에너지 관리 기업이 IoT 사업에 적극 나서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이런 가운데 영국은 국가적인 투자에 힘입어 공공데이터 분야에서 미국과 함께 가장 앞서 나가고 있다. 관련 기업과 기관들은 데이터가 유럽의 제조업 경쟁력을 좌우할 것으로 확신하고 빅데이터에 대한 총공세에 나섰다.
세계 최초의 개방형 데이터 전문기관인 영국 ODI(Open Data Institute)의 리처드 스털링 인터내셔널 디렉터는 "아직은 초기 단계이지만 개방형 데이터가 서비스 산업에 이미 적용된 것처럼 조만간 제조업에서도 활용될 것"이라며 "10~20년 전 웹이 나타날 때만 해도 전혀 생각지 못했던 회사들이 지금 인터넷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는 것처럼 데이터 기업들도 똑같은 길을 걸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사진·그래프 등 데이터를 시각화하는 사업을 하고 있는 오픈데이터소프트의 장마크 라자드 대표는 "개방형 데이터는 이전에는 생각조차 못했던 분야로까지 응용의 길을 열었다"며 "운송·장치 산업 등 기존 기업의 업무 처리에 대변혁을 가져올 수 있다"고 자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