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의 기습적인 양적완화는 미 연준의 양적완화 종료 이후 실탄 고갈을 우려하던 증시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지만 더 많은 돈 풀기가 디플레이션 탈출에 도움이 될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추가 양적완화가 부추긴 가파른 엔저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한층 커졌다. 반면 미국의 양적완화 종료는 사전에 예고됐던 만큼 시장의 반응은 조용한 편이지만 성급한 출구전략이 자칫 1990년대 일본과 같은 정책실패가 될 수 있다는 경고음이 나오고 있다.
지난달 31일 예상치 못했던 일본은행의 추가 양적완화 발표는 글로벌 금융시장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도쿄증시가 4.8% 이상 폭등한 데 이어 유럽과 미국 증시는 각각 큰 폭으로 치솟았다. 유럽 우량기업들의 주가를 지수화한 유로 스톡스지수는 하루 사이 2.55% 뛰어올랐고 미 뉴욕증시의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는 전날보다 각각 1.13%, 1.17% 올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일본은행의 조치는 미 연준의 양적완화 종료로 식을 뻔한 투자심리에 다시 불을 지피는 역할을 한 셈이다. 엔화는 뉴욕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112엔대로 올라섰고 10년 만기 일본 국채금리는 0.45%까지 떨어졌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날 일본은행이 시장을 움직일 수 있는 중앙은행의 힘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시장의 환호와는 반대로 구로다 총재의 '도박'이 초래한 리스크에 대한 우려도 고조되고 있다. 일본은행 금융통화정책위원 9명의 표가 추가 완화 찬성 5명, 반대 4명으로 팽팽히 엇갈렸다는 사실은 일본은행 내에서도 그만큼 논란이 거셌음을 보여준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은행의 추가 완화 조치가 투자자들의 기대감을 자극해 증시를 강세로 이끌고 있지만 투자자들 사이에 확산되는 과도한 낙관론이 결국에는 더 가파른 시장 조정을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고노 류타로 BNP파리바증권 이코노미스트는 "글로벌 시장이 양적완화에 의존하는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잠재성장률은 오르지 못한 채 중앙은행의 자산과 정부 채무만 불어나는 사태에 빠져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집권 여당을 포함해 일본 정치권 내에서도 일본은행의 조치에 대한 불안감이 표출되고 있다. 연립여당인 공명당의 야마구치 나쓰오 대표는 1일 "급격한 시장 변화는 부작용을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더 큰 문제는 돈 풀기 정책이 일본 경제가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날 힘을 키워주기보다는 체질을 더욱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일자 사설에서 "2013년의 양적완화는 장기 디플레이션의 고리를 끊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지만 지금은 양적완화에 대한 의존이 아베 신조 총리의 '세 번째 화살(성장전략)' 실행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애당초 양적완화 정책이 물가 하락에 대한 처방으로는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FT는 미국·일본 등 주요국의 대규모 돈 풀기에도 불구하고 금값은 2010년 이래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며 이는 중앙은행의 통화확대가 디플레이션을 막을 수 없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다만 지금의 경기 상황에서는 중앙은행의 자금공급이 유지돼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앞서 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양적완화 종료에 유일하게 반대한 나라야나 코처라코타 미니애폴리스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전 세계 디플레이션 우려 확산을 언급하며 "연준이 1990년대의 일본은행과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다"며 "채권 매입규모를 월 150억달러로 놓아두거나 제로금리를 1~2년 더 유지하겠다고 밝혔어야 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