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증도 많이 늘었지만 부실도 크게 늘고 있습니다.”
최근 유창무 수출보험공사 사장이 본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경제위기가 심화되면서 각종 보증기관의 보증도 폭발적으로 늘고 있지만 이에 따라 부실도 크게 늘고 있다.
보증확대라는 문제만 놓고 보면 지금의 상황은 지난 2001~2002년도 중소ㆍ벤처기업 프라이머리 채권담보부증권(P-CBO) 사태 당시와 비슷하다. 그때 김대중 정부는 꺼져가는 벤처붐을 되살리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으로 중소ㆍ벤처기업들로 하여금 회사채를 발행하도록 하고 이 회사채를 모아 P-CBO를 만들었다. 신용이 취약한 이들의 회사채를 모았기 때문에 당시 기술신용보증기금이 보증을 서줬다. 문제는 이들이 건실한 기업들이 아니라 지극히 취약한 기업들이었다는 점이다.
상황논리따라 수시로 전략 변해
결과는 당연히 막대한 부실이었다. 보증을 섰던 기술신용보증기금은 이후 수년 동안 엄청난 부실때문에 여론의 뭇매를 맞으면서 기관장이 경질되고 수조원의 국민 혈세가 투입됐다.
모든 정책에는 ‘당시의 상황논리’가 존재한다. P-CBO가 붐을 일으켰던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정부는 현재 극심한 신용경색과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보증기관으로 하여금 막대한 보증을 제공하도록 하고 있고 이는 당연히 부실의 급증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지금은 벤처붐 말기와는 상황이 다르다. 당시 많은 학자들과 전문가들은 정부의 벤처 지원정책을 반대했다. 쓰러져가는 벤처를 지원해봐야 목숨만 잠시 연장해줄 수 있을 뿐 근본적인 경쟁력 강화, 경제회복과는 거리가 멀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우리 경제가 침몰하느냐 다시 살아나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야 하고 보증확대는 우리 정부가 쓸 수 있는 훌륭한 무기다.
그럼에도 P-CBO사태가 다시 생각나는 이유는 ‘그때그때마다 다른’ 우리 사회의 지극히 편의주의적인 가치기준 때문이다.
만일 우리 경제가 1~2년, 혹은 2~3년 뒤 회복되면 분명 지금의 대규모 보증확대는 각 보증기관의 업보로 다가오게 될 것이 틀림없다. 왜 그토록 엄청난 보증을 퍼부어 국민 혈세로 메워야 할 부실을 키웠느냐는 지적일 것이다. 그러면서 기관장은 경질되고 각 보증기관들은 국민 세금을 지원받는 대가로 감원 등의 대규모 구조조정을 당할 것이다.
이런 일들은 보증뿐만이 아니다.
자원개발도 그렇다. 국제유가가 급등하면 “왜 해외유전개발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느냐”고 난리를 친다. 그래서 비싼 돈을 들여 유전을 사고 해외유전개발에 나선다. 그러다 유가가 하락하면 “싼 값에 원유를 수입하면 되지 왜 그렇게 비싸게 유전을 사고 많은 돈을 들여 유전개발을 했느냐”고 다그친다. 정치권과 감사기관ㆍ사정기관들이 대표적이다. 해외농장개발도 마찬가지다.
100년 내다보는 정책 세워야
국제적으로 식량위기가 고조되면 해외농업개발에 나서자고 소리를 높이다가도 막상 해외농장을 매입한 뒤 국제 곡물가가 떨어지면 “누가 그렇게 비싸게 돈을 주고 해외농장을 샀느냐”고 욕한다. 유전개발을 담당했던 한 정부의 관계자는 “한국에서 자원개발을 담당한다는 것은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일”이라며 “자원가격의 움직임에 따라 잘하면 본전, 못하면 감옥행”이라고까지 말한다.
중국은 지금 경제위기 속에서도 막대한 자금을 들여 해외자원기업을 인수합병(M&A)하는 등 해외자원개발에 적극 나서고 있다. 자원 없이는 ‘중국도 없다’는 전략적 판단에 따른 정책이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전략적 정책’이 무엇이 있을까. ‘그때그때 다른 판단기준’으로 어떻게 국가의 100년대계를 논하고 전략적 판단을 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