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3월11일] 유일한 선생


종업원지주제 도입(1936년), 전문경영인체제 확립(1969년). 유일한 박사가 기업사에 남긴 흔적이다. 일제시대에 이미 기숙사에서 수영장까지 갖췄다. 모두 종업원을 위한 배려다. 기업인으로서의 면모뿐 아니다. 선생의 모든 삶은 귀감 그 자체다. 1895년 평양에서 태어나 9세 때 미국에 건너가 고학으로 대학을 나온 선생은 사업가로 성공한 뒤 약을 만들어 병든 동포를 구하겠다며 1927년 귀국, 유한양행을 세웠다. 소년 시절부터 나이 50줄에 이르기까지 독립운동을 잊지 않았던 선생은 해방된 조국에서 오히려 냉대를 받았다. 대통령 이승만과 껄끄러운 관계였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독립운동자금 유용 등 약점을 잘 알고 있는 선생이 장관 입각 제의와 정치자금 요구에도 응하지 않자 대한민국은 입국허가마저 내주지 않았다. 어렵게 돌아온 후에는 탈세혐의로 고소 당한 적도 있다. 3공 초기에도 정치자금 요구를 거절해 세무사찰을 받는 고초를 겪었다. 결백이 입증된 뒤 동탑산업훈장을 받은 선생은 1964년 사재를 털어 유한학원을 설립하고 1969년에는 전문경영인에게 기업을 물려주면서 아들과 조카를 회사에서 내보냈다. 친족 중심의 파벌 형성을 우려해서다. 존경 받는 유일한 기업인이던 선생은 1971년 3월11일 76세로 사망하면서 전재산을 사회에 기부해 또 한번 감동을 자아냈다. 딸에게 홀로 남은 부인을 봉양할 땅 5,000평과 손녀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의 학자금 1만달러를 남겼을 뿐이다. 아들과 부인은 한 푼도 못 받았다. 기업인이자 독립운동가ㆍ신앙인으로서 어느 누구보다 위대하고 깨끗한 삶을 살았던 유 선생의 37주기. 정치자금을 짜내려 선생을 핍박했던 자들의 가치관과 선생의 뜻 중 어느 것이 우리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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