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임종건 칼럼] 전투적 경제위기론

논설실장 imjk@sed.co.kr

한국일보사 신관1층 로비에는 지난 60년 8월1일에 창간된 우리나라 경제지의 효시인 서울경제신문 창간호 1면을 동판으로 찍어놓은 액자가 걸려있다. 톱 기사 제목은 ‘경제 9월위기/갈수록 심각화’이다. 이 기사는 60년 7월 말 기준으로 물가가 전년 말 대비 15% 상승한 데 반해 생산지수는 3.8% 하락한 것을 비롯해 4ㆍ19혁명, 두 차례의 환율인상, 공공요금의 인상, 외국원조와 외환보유액의 감소, 정당의 복지예산증액 움직임 등을 위기의 원인으로 꼽고 있다. 위기 속에서 성장해온 경제 1인당 국민소득이 87달러에 불과했고 국내투자의 75%가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던 형편에 4ㆍ19혁명까지 터져 정치ㆍ경제적 혼란이 극에 달했던 당시 상황은 가히 하루하루가 위기의 연속이었을 것이다.경제위기는 그 후 5ㆍ16군사혁명으로 출범한 박정희 정권에서도 간단없이 되풀이 됐지만 개발연대가 시작되면서 지속적인 고도성장의 광채에 압도당했다. 한국경제가 4ㆍ19혁명 때에 버금가는 위기를 맞은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79년의 10ㆍ26사태 때였다. 이 사태의 충격으로 80년 한국경제는 - 2.1%성장을 기록했다. 6ㆍ25휴전 이후 처음 경험하는 마이너스 성장이었다. 그러나 위기의 결정판은 97년의 외환위기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경제주권의 상실이라는 국치수준의 재앙이었다. 98년의 경제성장이 –6.7%였다는 점에서 충격도를 가늠할 수 있다. IMF통제에서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후유증을 앓고 있고 요즘의 경제위기론도 그 연장선위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경제위기는 정부수립 이후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단속적(斷續的)으로 발생해온 것이다. 어쩌면 경제발전 자체가 위기대처 능력을 키우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IMF사태 전에는 경제위기론이 주로 언론에서 제기됐다. 이에 대해 정부는 위기를 부인했음은 물론 나쁜 소문이 나라를 부도나게 할 수도 있다며 협조를 요청했다. 언론은 직업의 속성상 사회현상을 회의적으로 볼 때가 많지만 외환위기 후 특히 정부의 낙관론에 대해 좀더 그렇게 된 면이 있다. 정부는 지금도 여전히 경제위기론에 대해서는 일단 부인하고 본다. 정부가 앞장서 위기를 조장할 수 없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지만 위기의 존재여부는 정부의 책임과 직결된 사안이라는 데서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경제위기가 어느 정도의 위기냐에 대해서는 인식의 편차가 크다. 서민 경제에서는 IMF 때보다 더 어렵다는 얘기가 많이 들리나 IMF사태가 다시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수는 아닌듯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 경제위기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두 차례에 걸쳐 피력했다. 탄핵기각 후 직무복귀하면서 발표한 대국민 담화와 청와대에서 가진 재계 총수들과의 회동에서다. 대통령 위기론인식에 불안감 담화에서 그는 “경제위기론에 대해 각별한 경각심을 갖고 대비하고 있다”며 “국민과 정부가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담화가 뒷맛이 개운찮 게 된 것은 노 대통령이 경제위기론의 의도론을 제기하면서 위기를 확대해서 국민불안을 조장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재계와의 회동에서 어조는 보다 명료해졌다. 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 정부정책을 비판하다 보니 본질이 왜곡된다고 했다.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게 아니라 위기론에 대해 대결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다.역대 어느 대통령이 경제위기론에 대해 이런 식으로 대응한 예가 있는가 싶다. 이전 대통령들은 이런 경우 대개 내각을 다그치는 재료로 삼았을 뿐이다. 노대통령이 싸워 이겨야 할 것은 경제위기이지 경제위기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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