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 디포(Daniel Defoe).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로만 기억되기에는 복잡한 인생을 산 사람이다. 사업가이자 투기꾼, 파산자, 최초의 경제평론가에 밀정까지. 1660년 출생인 그의 전공은 신학. 부친이 양초제조업에서 도축업으로 전업한 뒤 경제적 여유가 생긴 덕분에 청교도 신학대학에 들어갔다. 졸업 후 디포의 선택은 목사 대신 사업. 술과 담배, 의류와 향수 사업에 손을 댔다. 결과는 줄줄이 실패. 3,700파운드(요즘 가치 7억4,590만원)를 들고 시집온 아내의 지참금마저 날리고 32세에 1만7,000파운드를 빚졌다. 파산 선언과 소송의 와중에서도 디포는 투기 대상을 찾아 주식시장을 기웃거리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30대 후반에는 소책자로 유명해져 국왕의 자문역을 맡고 벽돌공장까지 성공했지만 또 다른 시련이 그를 덮쳤다. 의회를 비판한 글 때문에 체포 당한 것. 수감기간 중 사업이 망하고 처자식 8명의 생계까지 어려워진 그를 풀어주며 집권당은 각 지방을 돌면서 여론을 감시하는 밀정 역할을 맡겼다. 정권 홍보수단이었던 격일간지 ‘리뷰’를 창간한 것도 이 무렵이다. 신문사상 최초로 정치 사설과 경제 해설을 게재했던 ‘리뷰’는 무역과 상인의 도덕, 주식시장에 관한 기사를 빈번하게 실어 최초의 경제신문으로도 꼽힌다. 나이 60세에 이르러 정치적 족쇄에서 풀려난 디포는 ‘로빈슨 크루소’를 비롯한 10여편의 소설을 쏟아냈다. 소설의 성공에도 그의 말로는 불행했다. 빚쟁이를 피해 5년간 종적을 감췄던 디포는 1731년 4월24일 런던 근교에서 객사했다. 사람은 죽어도 예술은 남는다고 했던가. 2003년 노벨문학상은 ‘로빈슨 크루소’를 풍자한 남아공 작가 존 쿠체에게 돌아갔다. 디포의 그림자, 참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