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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정치 시스템은 왕권을 끊임없이 견제한 사대부를 위한, 사대부의 민주주의였습니다. 왕에게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소신 있는 재상들도 적지 않았는데 현재 우리 정치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지요."
역사만화 베스트셀러 작가인 박시백(51·사진) 화백은 최근 경기 수원시 파장동 소재 경기인재개발원에서 열린 특강에서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된 위대한 기록물 '조선왕조실록'에서 수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박 화백이 고증을 통해 그린 만화 전집 '조선왕조실록'은 지난 2003년 첫 출간 후 최근 개정판까지 300만부 가까이 팔렸다. 박 화백은 이 작품으로 2013년 제10회 부천만화대상을 수상했다.
사극 드라마를 보다 역사지식의 빈곤함을 느껴 우연히 접한 것이 국역본 '조선왕조실록'. 그 매력에 빠져 한 일간지 만평작가 일도 그만두고 12년 동안 역사물 창작에 매달린 그는 "'조선왕조실록'이 당대의 후임 왕이나 권력자들이 아닌 먼 후대에 살게 된 우리를 위해 남겨진 기록"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왕의 사후 후임 왕의 지휘 아래 실록청이 만들어지고 사관들이 작성한 사초를 근거로 실록이 작성되는데 왕이라 하더라도 사관을 시켜 실록의 발췌본을 볼 수 있을 뿐 맘대로 실컷 열람하지는 못했다. 실제로 세종을 흠모했던 정조조차 세종실록을 온전히 볼 수 없었다. 사초로 인해 후대에 일어날 수도 있는 사화(史禍)의 빌미를 없애려고 한 것이다.
박 화백은 "'조선왕조실록'은 방대한 양뿐 아니라 팩트(사실)의 보고라는 점에서 위대한 기록물"이라며 "팩트를 통해 재해석되고 재평가받아야 할 역사적 인물이 적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미스터 클린'으로 불리는 황희 정승은 실록에는 오히려 수뢰·매관매직에 연루된 인물로 기록돼 있다. 한 마디로 수신제가(修身齊家) 덕목과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박 화백은 "그러나 뛰어난 정책 판단력을 가지고 왕에게 반대 의견을 직언하는 소신 있는 인물로 조선왕조에 그만한 정승이 없었다"며 "실록에 '세종이 황 정승의 의견을 따랐다'는 기술이 자주 나온다"고 덧붙였다.
16세기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도 신념과 덕을 갖춘 재상이다. 당대 최고 권력자인 조광조가 성급하게 개혁정치를 펼쳐 오히려 백성들이 힘들어하자 왕에게 서슴없이 반대 의사를 밝혔다. 김안로의 무고로 유배를 당하면서도 민본을 버리지 않았던 그를 박 화백은 새로 조명돼야 할 인물 1순위로 꼽았다. 연산군의 폭정을 이끌어 대표적 간신으로 알려진 임사홍도 젊은 시절 세조의 책사 한명회에 대한 탄핵 상소를 올린 강단 있는 인물로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박 화백은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간언했던 인물들에게서 가장 중요한 재상의 역할을 새삼 깨달았다"며 "한낱 시골 유생도 거리낌 없이 조정에 상소를 올렸던 것에서 보듯 왕권과 신권이 적절히 상호 견제할 때 정치 발전을 이뤘다"고 주장했다. 이어 "천재지변 같은 화를 입었을 때 왕은 주저 없이 자신의 부덕을 꾸짖는 처절한 반성문을 내고는 했다"며 "실정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이 시대 정치권과 대비되는 모습"이라고 덧붙였다.
성공 후의 나태함과 실패 후의 비관을 경계해야 함을 실록에서 배우고 있다는 그는 "'조선왕조실록'이 더 많이 알려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아쉽다"며 "다음 작품으로는 1910~1940년대 항일 독립운동에 초점을 맞춘 일제 강점기의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