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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뜻 이루기 위해 나무와 인연 맺어
수십년 된 나무처럼 한결같은 '나무쟁이'
이제는 나무에 보탬되는 일 하고 싶어
근현대가구박물관·목재도서관 세울 것
"목재 산업이 발전하려면 적어도 30년 주기의 조림계획이 필요해요. 수령이 30년 된 경제림에서 벌목하고 다시 나무를 심어 자원이 순환되도록 해야 합니다. 식목과 벌목이 가능한 '나무 농장'이 많아지면 우리나라도 유럽 등 선진국처럼 목재 산업을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키울 수 있어요."
◇부친의 사업 실패…영림목재의 탄생=이 회장의 부친인 고 이용복씨는 원래 평양의 제재소에서 톱 수선을 하던 기술자였다. 피붙이 하나 없는 남한으로 내려온 후 이런저런 사업에 뛰어들다가 실패를 거듭하던 부친은 논농사가 잘돼 있는 남한에서는 벼 베는 자동기기가 있으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며 갖고 있던 재산을 쏟아부어 제품개발에 매진했다. 하지만 벼 베는 날이 제대로 들지 않아 시장에서 결국 외면을 받았고 아들의 대학교 등록금조차 낼 형편이 되지 못해 이 회장은 휴학하고 군대에 입대했다. 세상 물정에 밝아 집안 형편이 어려울 때마다 현명하게 해결해온 모친은 제재소를 다시 하면 오히려 안정적인 사업이 가능할 거라고 부친을 설득했고 예전에 자신에게 신세를 졌던 친구에게 돈을 빌려 인천 도화동에 사업장을 내게 됐다. 그게 바로 영림목재의 시작이다.
◇나무와 인연을 맺다=군 복무를 마치고 학교까지 졸업한 이 회장은 대우전자 무역부에 들어가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뛰어난 사교성에다 업무실력까지 인정받아 동양정밀로 스카우트되면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부친이 쓰러지면서 이 회장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됐다.
"어머니가 전적으로 제 판단에 따라 결정하겠다고 말씀하더군요. 조그만 공장이지만 팔아서 직장생활을 편히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고 사업에 의욕을 갖고 키우겠다면 맡아서 잘해보라고 하시더군요. 며칠 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했지만 부모님의 피와 땀으로 일군 사업장을 제 힘으로 잘 키우고 싶다는 생각에 맡기로 했죠."
1978년 6월1일 이 회장은 영림목재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하지만 대표이사가 아닌 차장 직함이 찍힌 명함을 갖고 일했다. 제대로 경영수업을 받지 못하고 회사를 맡게 됐지만 실무적으로 차근차근 배워간다는 생각으로 그 후로도 오랫동안 차장 명함을 지녔다고 한다. 이 회장은 사업이 크게 된 중요한 계기로 샘표식품 납품과 삼성전자 납품을 꼽는다.
"1980년대 산업화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아파트가 엄청나게 들어서기 시작했어요. 아파트에서는 메주를 담그기 어려우니 자연스럽게 간장을 사서 먹는 소비자들이 늘었죠.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타고 샘표가 컸는데 덕분에 간장 박스를 공급하던 우리 회사도 클 수 있었죠."
이 회장은 삼성전자 수원공장 진출 성공도 영림목재가 본궤도에 오르는 데 중요한 디딤돌이 됐다고 회고한다. 완성된 가전제품을 담을 목재 상자를 공급하는 일이었는데 영림 말고도 4개 업체가 이미 일하고 있었다. "삼성전자 측에서는 공장에서 생산해 옮겨오는 데 시간이 걸리는 만큼 원자재를 갖고 와서 공장 마당에서 조립해 납품하라고 요구했어요. 하지만 효율성이나 원자재 수급 측면에서는 인천 공장에서 완제품을 만드는 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삼성에도 그렇게 제안했지요. 처음에 그쪽 담당자들은 그게 가능할까 의구심을 나타냈지만 현장에 있던 다른 업체들보다 정확하게 물량을 대니까 깜짝 놀라더군요."
비결은 한발 앞선 정보력이었다. 입사하기 전 대기업에서 근무했던 이 회장은 현장에서 나오는 물량 주문을 기다리기보다 기획실을 통해 생산 물량을 먼저 파악했던 것이다.
◇영림의 성장…갑자기 찾아온 위기의 순간=목재상자 납품에만 만족하면 사업을 키울 수 없다고 판단한 이 회장은 과감하게 삼성전자 납품을 끊고 특수목 분야에 뛰어들었다. 이에 불단과 교구 등을 만들어 일본에 수출하기도 하고 당시 잘나가던 영창과 삼익악기 등에 피아노나 기타 제작에 필요한 원목을 공급했다. 또 한샘의 부엌가구에 들어가는 문짝도 공급하면서 사업 규모는 날로 커졌다.
그러다 위기가 찾아왔다. 1993년 목재 값이 급등락하면서 비싸게 사뒀던 자재 값이 갑자기 폭락한 것이다. 그때 호되게 수업료를 치른 후 앞으로는 이런 어려움을 겪지 않으리라 결심했지만 IMF 때는 더 큰 위기에 봉착했다. 고객사로부터 받은 어음들이 부도를 맞으면서 더 이상 사업을 유지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한 것이다. 게다가 원자재 자체가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환율이 오르내리면서 수억원씩 손해를 입던 때였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심정으로 친하게 지내던 중견 피아노 업체가 3억원어치만 원자재를 미리 사달라고 요청했어요. 흔쾌히 돈을 내줬고 자재는 1년에 걸쳐 필요할 때마다 가져가더군요. 어찌나 고맙던지…. 수출입은행의 담당 본부장한테 받은 도움도 잊을 수 없어요. 대출연장이 원래 6개월 정도만 가능했는데 본부장이 본사를 설득해 1년으로 연장해줬어요. 이분들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영림목재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일본 유학 길에 올라 목재 산업의 내일을 보다=선진 임업 강국을 눈으로 직접 보고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던 이 회장은 지난 2002년 52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일본 유학 길에 오른다. 와세다대 국제대학원의 외국인 연구원으로 들어간 이 회장은 시간만 나면 대도시의 목재 관련 업체나 연구소를 찾아다녔다.
"일본에서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목재 산업을 키우고 있더군요. 벌목하면 반드시 식목하는 문화는 물론 목재 산업에 대한 연구개발(R&D) 투자도 많았구요. 우리나라는 자원 자체가 한정된 만큼 고부가가치 제품을 개발해야 승산이 있다는 판단이 들더군요."
그런 깨달음은 영림목재가 제2의 도약을 준비하는 발판이 된다. 현재 영림목재는 120여종의 특수 수종을 개발, 제품화하고 있다. 2009년에는 옹벽 붕괴를 막는 나무와 강바닥이 쓸려나가는 것을 막는 나무틀을 개발해 산업포장(대통령 포장)을 받기도 했다. 이어 유럽식 고급원목 서재가구인 'e-라이브러리'를 통해 서재 가구 시장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최근에는 아시아 최초로 '이팔(EPAL·유럽팰릿연합)' 인증을 따내며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다. 인증을 취득한 팰릿(물류 과정에 쓰이는 받침대 형태의 운송용기)은 유럽 내에서는 여러 차례 재사용이 가능하다.
이 회장은 2만5,000평 규모의 충남 당진 물류센터를 중장기적으로는 영림목재의 핵심축으로 육성시킨다는 비전을 갖고 제5공장까지 확장하고 있다. 특히 독일의 바이닉(WEINIG)사로부터 5억원짜리 초대형 재단기를 국내 최초로 도입하는 등 생산 자동화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목재나 철강 등은 공장 규모가 곧바로 경쟁력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남동공단에 자리한 본사에서는 고급원목가구를 제작하는 데 힘을 쏟고 물류 관련 자재 제작은 당진이 주로 맡을 겁니다."
이 회장은 70세쯤 되면 1단계 은퇴에 들어선다는 계획이다. 아들인 이승환 대표가 현재 물류전문기업인 장연을 잘 경영하고 있는 만큼 후계자로 자질을 키운 다음에는 나무쟁이로 남아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노후를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다. "근현대가구박물관과 목재전문도서관을 세우는 게 제 최종 목표랍니다. 그동안 고가구박물관은 있었지만 근대 이후 가구의 발전사를 집대성한 박물관은 국내에는 없었거든요. 목재전문도서관도 목재 산업의 중장기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정말 필요한 공간입니다. 그동안 나무가 나를 살렸으니 이제는 내가 나무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사진=이호재기자
■이경호 회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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