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정·청 수뇌부가 이 국회의원들이 법안을 발의할 때 재원 확보 방안을 의무적으로 제시하도록 하는 ‘페이고(PAYGO·pay as you go)’ 법안을 새누리당 당론으로 추진하기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23일 전해졌다.
이렇게 될 경우 무분별한 선심성 법안 추진에 따른 예산낭비를 막는데는 효과적이지만 의원들의 입법자율성 침해 가능성도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따라서 여권이 4월 임시국회에서 페이고 원칙을 담은 국회법 개정을 어젠다로 들고 나올 경우 여야간 마찰이 예상된다.
새누리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이날 “기획재정부가 추진해 온 페이고 법안에 대해 당에서도 이견의 목소리가 적지 않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김기현 정책위의장 등 지도부에 적극 추진을 주문하면서 당정청간에 페이고 추진에 대한공감대가 모아졌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박 대통령은 최근 청와대 비서실은 물론 새누리당 지도부에게게 ‘페이고’ 도입 문제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일일이 챙겨 묻고 신속한 제도 도입을 당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현재 공공부채가 820조원을 넘는 등 부채 규모가 급증해 정부가 지방자치단체 파산제, 공공기관 방만 경영 개혁 등 부채 줄이기에 대대적인 드라이브를 거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또한 저출산 고령화 추세와 각종 선거 등으로 인해 복지와 사회간접자본(SOC) 수요는 늘어나는 반면 세금 징수는 정체돼 있어 국가재정의 근간이 흔들릴 우려마저 제기되는 것도 여권이 페이고 도입에 박차를 가하는 이유다.
이에 따라 당정청은 새누리당 의원들이 각자 국회에 제출한 페이고 관련법들을 하나로 묶어 당론으로 입법을 추진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현재 국회에는 새누리당 김무성, 이한구, 이만우, 이완영의원이 제출한 페이고 도입 관련 법안이 계류돼 있다. 페이고 제도를 의원 입법에도 도입하면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에 치우쳐 재정 건전성을 해치는 법안의 발의를 막을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이한구 의원은 최근 기자와 만나 “페이고 법안은 의원입법이 예산과 규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의원들이 미리 알고 표결하라는 것으로 포퓰리즘을 통제해 재정건전성을 유지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앞서 미국 의회는 재정 적자 해결이 최우선 과제였던 1990년대 초반에 페이고 제도를 도입했고, 프랑스 의회 역시 비슷한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미국은 의회조사국(CRS), 의회예산국(CBO), 회계감사원(GAO) 등에서 입법안의 타당성을 분석하고 상·하원에서 엄격히 심사하는데 우리는 국회 입법조사처와 예산정책처가 의원입법을 돕지만 다소 한계가 있다는 분석이다.
이완영 새누리당 의원은 기자와 만나 “현재 정부가 만들어 국회에 제출하는 법안에는 재원 마련 대책과 예산 추계안 등이 포함돼 있지만 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에는 이런 내용이 부족해 본회의는 물론 상임위 전체회의에서도 의원들이 법안 내용이나 재정에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모르고 투표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정부 법안은 입법예고, 규제심사, 국무회의 심의 등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지만, 의원입법은 국회 법제실의 검토 등 검증 절차가 단순한 측면이 있다. 지난 15대 국회에서 1,100여건이던 의원들의 법안제출건수는 18대 국회에서 1만2,200여건으로 급증했다. 국회 통과율도 약 17%로 2%대에 머무는 미국에 비하면 높다. 국회 예산정책처의 한 고위 관계자는 기자와 만나 “의원들이 언론이나 시민단체 등에서 법안 발의 실적을 집계하다보니 재정이나 예산에 미치는 비용추계를 별로 고려하지 않고 내는 법안도 많아 이를 다소 규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페이고가 의원 입법에도 도입될 경우 입법을 위한 의원들의 활동이 침해돼 현재처럼 정부 입법에만 적용해야 한다는 반론도 야당은 물론 여당 내에서도 만만치 않다. 실례로 2010년 6월 지방선거에서 화두였던 ‘무상급식법’과 같은 법안을 제출하려면 사전에 막대한 예산을 어떤 방식으로 마련할지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돼 정치권, 특히 야당에서 결정적인 킬러 콘텐츠(Killer Contents)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야당의 경우 소요 예산을 추계하는데 여당만큼 정부의 협조를 받기 어려워 입법활동에 제약이 따를 수 있다는 지적이다.
민주당 등 야당은 무엇보다 재정건전성 유지를 위해서는 정부의 재정 지출 억제보다는 ‘부자 감세’가 중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어 페이고 법안이 본격 추진될 경우 여야간 논란이 커질 전망이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재정건전성 유지를 위해서는 여권이 부자감세 기조를 바꾸는데 방점을 둬야지 의원들의 입법권을 통제하려 해서는 안된다”며 “생산적인 복지를 포퓰리즘으로 모는 것도 결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