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철새 부보상(負褓商)’ 황원갑 <소설가ㆍ역사연구가> 부보상(負褓商)을 가리켜 ‘장시(場市)의 후조(候鳥)’라고 불렀다. 부보상은 보부상(褓負商)이라고도 불렀으며, 등짐장수와 봇짐장수를 아울러 가리킨 이들은 물물교환시대에 생산자와 소비자, 시장과 시장을 이어주던 유통경제의 주역이었다. 부보상의 유물을 상설 전시,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곳이 충남 예산군 덕산면 충의사(윤봉길 의사 사당) 경내의 예덕상무사(禮德商務社) 유물전시관이다. 중요민속자료 30호로 지정된 이곳 유물 160여 점은 아침에는 동쪽, 저녁에는 서쪽으로 유전(流轉)하던 부보상들의 애환서린 역사를 전해주는 민속학과 서민경제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예덕상무사는 철종 3년(1853)에 강제로 해산당하고 시장에서 쫓겨날 때까지 예산 덕산 면천 당진 등 4개 읍 15개 장시의 상권을 장악하던 이 지역 부보상들의 본부였다. 백제가요 ‘정읍사’가 행상 나간 지아비를 기다리며 그 지어미가 망부석에 올라 부른 노래란 사실로 미뤄볼 때 부보상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부보상이 조직적 상단을 형성, 엄격한 위계질서와 규율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조선왕조 개국 직후였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때 군량을 운반한 부보상의 우두머리가 백달원이었다. 이태조는 조선 건국 후 백달원에게 벼슬대신 상행위의 독점권과 팔도 부보상의 총두령 직을 내렸다. 이로부터 부보상단은 조선조 내내 조정의 비호 아래 상권을 장악했고, 왕실에 절대 충성을 바치는 보수 세력이 됐다. 부평초처럼 떠도는 부보상들에게도 두 가지 중요한 원칙이 있었으니 하나는 쟁(爭)이요, 하나는 화(和)였다. 쟁이란 ‘1리(厘)를 보고 5리(里)를 다툰다.’는 경쟁심이다. 장터에 조금이라도 먼저 도착하면 한 시세 더 받을 수 있다는 치열한 상혼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면 화는 상부상조로써 화합과 단결을 뜻한다. 같은 행상이지만 등짐장수에 비해 봇짐장수의 재력이 더 넉넉했다. 지게를 운반도구로 삼은 등짐장수들은 생선 젓갈 소금 질그릇 옹기 무쇠 담배 등 중량과 부피가 크나 비교적 값싼 상품을 취급했고, 봇짐을 질빵으로 짊어지고 다니던 보상들은 금은 포목 주단 유리제품 등 값비싼 가공품을 취급했다. 전성기의 부보상 규모는 8도 3,000여 시장에 200만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이처럼 막강하던 보부상단이 힘을 잃고 몰락한 것은 교통수단의 발달로 활동이 급속히 위축되고, 부보상단의 결집된 힘을 두려워한 일제의 악랄한 탄압 때문이었다. 예산 덕산 지역 부보상들의 애환서린 자취는 예덕상무사 마지막 두령인 윤규상(尹圭相, 86) 옹이 이끄는 보부상난전재현놀이보존회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봇짐장수 등짐장수들이 한 걸음이라도 더 빨리 달려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먼지를 풀풀 날리며 장터로 향하던 험한 산길 들길이 지금은 모두 포장이 되어 자동차와 기차가 달리고 있다. 그 현대의 이기를 타고 이제는 선거철만 되면 ‘정치철새’들이 쌩쌩 달려가고 있으니 세월의 흐름은 참으로 무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