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5월31일] 증권파동


1962년 5월31일 오후, 증권거래소가 휴장에 들어갔다. 부도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거래소의 부도’가 의아스럽겠지만 주식회사로 운영되던 당시 거래소는 거래 당사자가 주식매매 대금을 치르지 못할 경우 대신 결제해줘야 할 의무가 있었는데 돈이 없어 휴장을 선언한 것이다. 사태의 원인은 투기. 상장주식이라고는 12개 종목에 불과했던 당시 발행물량이 적었던 연증주(증권금융주)를 5개월 사이에 435배나 급등시켜 차익을 얻은 투기세력은 1962년 3월부터 물량이 가장 많았던 대증주(증권거래소주) 사들이기에 나서 한달 사이 주가를 4.6배나 끌어올렸다. 개미들이 따라붙자 유상증자 물량의 할증 발행에도 상승세는 식을 줄 몰랐다. 주가는 끝없이 오르고 5월 거래대금(2,510억환)은 연간 국세수입(1962년 2,212억환)을 넘어섰으나 커진 시장 규모가 주식시장의 발목을 잡았다. 대납자금 부족에 따른 휴장은 정부의 긴급지원(280억환)으로 닷새 만에 풀렸으나 책임 공방전 속에 혼란이 지루하게 이어지며 1963년 2월 무기휴장이라는 결과를 빚었다. 문제는 투기세력의 주체가 ‘혁명’ 주체였다는 점. 주가조작으로 마련된 자금은 공화당 창당자금으로 들어갔다. 당사자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비밀에서 해제된 미국 국무부 문서에는 권력이 개입했던 사실이 드러난다. 증권파동을 영국의 1720년 주가조작 사건인 ‘남해버블 사건 이후 최악’으로 평가한 보고서도 있다. 반면 개미들은 쪽박을 찼다. 한국경제는 더 큰 병을 얻었다. 투자자들의 외면으로 증시를 통한 내수자금 조달길이 막히자 정부는 외자조달에 목을 걸었다. 거액의 차관을 만지는 동안 ‘떡고물’이 성행하고 부패구조가 자리잡았다. 망각되는 증권파동의 기억 속에서 또다시 거래소 민영화 얘기가 들린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