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진행 중 흔히 보게 되는 장면이 있다. 어떤 사건의 기일에 그 사건의 심리를 속행하려 할 때 한 당사자는 이를 환영하는 반면 상대방 당사자는 변론을 종결해주길 희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다. 한 당사자는 자신에게 한 기일만 더 주어지면 상대방이 한 일을 모조리 입증할 증거를 제출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상대방 당사자는 “저 사람이 시간만 끌려고 하는 것입니다. 빨리 판결을 내려주세요”라고 말한다. 혹시나 싶어 한 기일을 속행한다. 증거제출 기회마저 부여받지 못한다면 불공정한 재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속행을 구했던 당사자는 빈 손으로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한 기일만 더….” 판사라면 누구나 거의 매 기일마다 이런 경험을 겪는다. 그 때마다 기일속행으로 불필요하게 심리를 연장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변론종결로 불충분하게 심리를 종결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되기 마련이다. 게다가 대부분 기일속행을 구하는 당사자가 제출하겠다는 증거를, 재판부로서는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판단하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판사들만 이런 경험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싱가포르의 판사들도 같은 고민을 해오다가 입법에 의해 이를 해결했다고 한다. 싱가포르에서는 1990년까지 소를 제기하고 첫 번째 재판기일이 지정되기까지 6~7년이 걸렸다고 한다. 6~7년은 1심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가 아니라 첫 번째 기일 지정까지 걸리는 기간이다. 1990년 소송지체 현상을 막기 위해 개혁을 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소송비용 부담에 관해 원칙적으로 원고, 상소인 또는 법정개정을 신청하는 자는 재판진행에 관한 비용을 법원에 미리 납부해야 한다. 가령 소가가 100만 불을 초과하는 사건에서 세 번째 기일까지는 당초 납부한 소송비용만으로 속행되지만, 네 번째 기일은 9,000불, 다섯 번째 기일은 3,000불, 여섯 번째 기일부터 열 번째 기일까지는 매 기일당 5,000불, 그 이후에는 매 기일에 7,000불을 내야 한다. 또 소송이 1년 이상 진행되지 않으면 소취하로 간주된다. 다만 당사자가 특별히 소송회복을 요청하는 경우에 이를 허가할 수 있다.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는 ‘권리구제를 위해 소송을 하는 사람들에게 저렇게 돈을 많이 내라고 하다니 지나치게 가혹한 조치 아닌가’라고 생각했고, 당연히 국민들의 불만도 크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싱가포르 국민들과 국제사회의 평가는 정반대다. 국민들의 97%가 사법제도를 공정하다고 생각하고 전폭적으로 사법을 신뢰하고 있으며, 국제기관ㆍ기구 다수가 싱가포르 사법제도를 세계 1위로 평가한다고 한다. 게다가 이 같은 개혁정책으로 사건적체가 해소되고 대부분의 사건은 소 제기 후 1년 안에 종결됐다. 물론 다른 개혁조치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룬 성과겠지만 이러한 결과는 매우 놀라운 것이다. 싱가포르의 개혁 내용을 나는 ‘비용의 역설’이라고 부르고 싶다. 매 기일 당사자의 소송비용을 증가시켰음에도 오히려 사법서비스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 당사자가 처음 변호사를 선임하고, 소송비용을 납부하면 그 이상의 추가비용을 납부할 필요가 없다. 기일이 늘어날 때마다 기일 당 평균 소송비용은 감소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뚜렷한 증거가 없는 당사자로서는 ‘혹시’ 하는 요행을 노리면서 기일을 증가시킬 유혹에 빠지게 된다. 한계비용이 ‘0’이다 보니 기일지체로 인해 생길 이익이 없다 해도 기일지체를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상대방 당사자의 고통 또는 불편을 줄이기 위해 우리 민사소송에서도 ‘비용의 역설’을 진지하게 고민해 볼 때는 아닐까. ▦ 이글은 본지 홈페이지(hankooki.com)뿐만 아니라 서울중앙지방법원 홈페이지(seoul.scourt.go.kr) '법원칼럼'을통해서도 언제든지 볼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