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12월 25일] '정부 혁신'의 역설

지난 참여정부 때 공직사회를 들볶은 ‘혁신’을 생각하면 가끔 엉뚱한 장면이 연상되고는 한다. 자동차 한 대 굴러다니지 않는 한산한 평양거리 한복판에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교통순경의 모습이 그것이다. 단순히 희화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동차도 없는 도로에 기계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 모습에는 바로 ‘노동자는 일하는 척하고 국가는 월급 주는 척했다’는 공산주의 몰락의 비밀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아무리 열심히 한들 개인은 물론 사회와 국가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쓸데없이 인력과 자원을 낭비하는 것이므로 오히려 국가적으로 해가 된다. 그러나 숨막히는 통제체제하에서 국가가 명령하는 일의 의미나 가치, 비용과 효과 따위를 따지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오로지 열성적인 시늉만이 허용된 생존법이다. 소모적 겉치레 실적경쟁 몰두 꼭 참여정부의 혁신운동 때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한국의 공직자들만큼 열심인 정부도 흔치 않을 것이다. 지위고하, 분야와 업무를 가릴 것 없이 바쁘다. 장관을 비롯해 고위직으로 갈수록 각종 회의와 행사, 국회 등에 시간을 쪼개면서 산다. 일선 공무원들이라고 다를 게 없다. 가령 부처별로, 기관별로 매혹적인 구호와 비전 등을 경쟁적으로 내걸고 최선을 독려하는 결의대회와 회의가 줄을 잇는다. 승진경쟁에서 이기려면 정교한 평가모델에서 좋은 등급을 받고 실적을 올려야 한다. 업무가 국민과 국가경제에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점수가 중요했던 것이다. 균형 복지 등 많은 성역이 생겨나고 공동목표보다는 자기실적과 집단이기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흥미로운 것은 공직자들이 그렇게 열심이었는데도 정부 또는 공공부문의 경쟁력이, 아니면 국민의 만족도가 올라갔다는 흔적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역대 정부가 대개 그랬다. 더구나 ‘큰 정부라도 잘하면 된다’며 공무원을 10만명씩이나 늘렸던 참여정부를 국민은 외면했다. 도대체 어디가 잘못된 것인가. 정확한 진단은 전문가의 몫이지만 시대적 요구와 껑충 올라간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정부 시스템의 재설계가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정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잘못 판단한 채 국민과는 별 상관없는 ‘그들만의 혁신’에 열중한 것이다. 중앙, 지방 할 것 없이 본질적인 문제는 놔둔 채 호박에 줄 긋기 식의 겉치레 행정, 낭비성 사업들이 봇물을 이룬 것은 당연한 결과다. 그러니까 덮어놓고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꼭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혁신운동의 역설’은 말해준다. 포퓰리즘 청산해야 선진화 성공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 다 되가는데도 아직 앙시엥 레짐(구체제 부정)의 진통을 겪고 있다. 전대미문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이명박 정부가 내건 ‘선진화’를 국민이 맛보도록 하려면 촌각을 다투어야 하는 상황에서 여태 인적 진용조차 갖추어지 않았다면 문제다. 과감한 부처통합과 함께 기대 속에 출발했지만 촛불에 밀려 주춤거리다 다시 시동을 거는 모습이다. 그러나 시간은 짧고 갈 길은 멀다. 가령 백여년 전 농경시대와 정치적 계산의 산물인 후진적 지방행정체제에 대한 대처식 개혁이 없이 작은 정부 실현이 가능할지, 고질적인 혈세 낭비를 없앨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명박 정부의 선진화 비전은 뻔적이는 몇 개의 공을 번갈아 던져올리며 잠시 관객의 시선을 끄는 마술사의 저글링 같은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공무원도 피곤하고 국민도 불만인 후진형 정부에서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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