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 금융 정책

수익 90% 기업에 의존… '등급 인플레'로 고객 입맛 맞추기

■ 못믿을 신용평가사<br>잘못된 결과 나와도 불이익 없고 약관조항엔 책임회피 문구 버젓이<br>투자자 불신에 입지 갈수록 좁아져 자정노력 없으면 시장 잃을수도


"고객을 놓치기 싫으면 그들의 입맛에 어느 정도 맞출 수밖에 없습니다." 신용평가사의 신용평가가 왜 이렇게 엉터리냐는 질문에 익명을 요구한 내부자의 변이다. 수익의 절대비중을 신용평가 대상들의 의뢰비에 의존하는 신평사들로서는 구조적으로 '갑'에 종속된 '을'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혹시라도 잘못될 경우에 대비해 신평사들은 약관 조항을 통해 신용평가에 대한 책임을 피해갈 수 있도록 방패막이를 세우고 있다. '아니면 말고 식 신용평가'를 남발해도 책임추궁을 당하지 않는 구조를 마련해놓은 것. 전문가들은 "신평사들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다면 결국 업계 전체가 금융시장에서 외면당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신용등급 인플레가 수익을 결정한다=국내 신평사들 수익의 90%는 신용등급 평가를 의뢰하는 기업들에서 나온다. 객관적으로 신용등급을 매겼다가 의뢰기업이 거래를 철회하면 회사 수익에 상당한 타격이 불가피하다. 객관적 평가보다 의뢰기업이 원하는 입맛에 맞춰 평가해주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이유다. 대한해운이 대표적인 사례. 한국기업평가는 지난 2009년 2월 대한해운의 신용등급을 기존 'A- 긍정적'에서 'A- 부정적'으로 수정했다. 신용등급에는 변화가 없지만 향후 추세를 부정적으로 본 것이다. 그러자 대한해운은 한기평을 제외한 한국신용평가와 한신정평가에 신용등급 평가를 의뢰했다. 한기평 입장에서는 신용전망을 낮추는 '결단'을 내렸지만 그로 인해 중요한 고객 한 곳을 잃어버렸다. 신환종 우리투자증권 연구원은 "신평사 내부에는 투자자 보호보다 실제로 회사 수익에 보탬이 되는 발행자에 친화적인 관행인 뿌리 깊이 박혀 있다"며 "제대로 된 평가를 하면 고객을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에 신용등급 인플레이션이 횡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등급평가 잘못돼도 불이익 없어=신평사들의 부실한 신용평가에 대한 '모럴해저드'는 심각한 상황이다. 잘못된 신용평가에 대해 소송을 비롯한 외적 제재는 물론 사내에서도 급여나 승진 등에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 분위기다. 한 신평사 연구원은 "신용등급 평가가 잘못됐다 하더라도 사내에서 불이익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연구원 개인의 양심 때문에 괴로워하는 경우는 가끔 있어도 친기업적 신용평가를 했다고 해서 회사 내에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는 없다"고 전했다. 신평사들은 또 약관을 통해 책임에서 벗어나 있다. 신용등급 평가서의 약관 조항에 '주관적 평가'라든가 '참조만 할 사항' 등의 단서조항을 붙여 투자의 책임은 본인들이 아니라 투자자라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금융기관을 비롯한 투자자들은 신평사들의 신용등급을 존중하고 중요한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게 현실이다. 신평사들이 약관 조항을 방패 삼아 책임을 회피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금융감독원의 한 관계자는 "애매한 조항 때문에 현실적으로 투자자들이 소송을 한다고 해도 승소하기가 쉽지 않다"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세계적으로 신평사들에 대한 소송이 제기됐지만 역시 책임 부분을 따지기가 쉽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평가 못 믿겠다" 신평사 입지 갈수록 축소=최근 국내외 투자가들 사이에서는 국내 신평사들의 신용평가 자료보다 증권사들이나 투자은행(IB)의 자료를 더욱 신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국내 신평사들의 신용평가 능력을 믿지 못하겠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현재 상태가 지속된다면 결국 대규모 자금투자가 필요한 사업에 대한 신용평가는 증권사나 해외IB 차지가 될 것"이라며 "신평사들 스스로 자구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금융시장에서 생명처럼 소중한 신뢰를 완전히 잃게 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증권사의 한 관계자는 "글로벌화돼 가고 있는 국내 기업들로서는 해외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신용등급을 받기 위해 비용을 이중으로 치르려 하지 않을 것"이라며 "신평사들의 신용등급 평가가 중요한 투자에서 배제되는 것은 자승자박이며 이를 풀어야 할 주체도 바로 신평사"라고 꼬집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