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틸라의 훈족에 쫓긴 피난민들이 갈 곳은 없었다. 겨우 찾은 질퍽한 늪지대에 말뚝을 박아 집을 올렸다. 누구 하나 눈여겨보지 않았던 이들은 역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복식부기와 해상보험, 국가가 관리하는 계획 조선에서 문장의 인용부호와 마침표까지 모두 이곳에서 나왔다. 어디일까. 697년 통령(국가원수)을 선출한 이래 1797년 나폴레옹군에 망할 때까지 지중해 무역을 주름잡았던 베네치아(베니스)다.
△초라하게 시작한 베네치아가 무려 1,100년 동안 공화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셰익스피어가 지은 '베니스의 상인'을 통해 엿볼 수 있다. 피도 눈물도 없이 돈만 밝힌다고 묘사된 것처럼 베네치아인들은 장사꾼으로 태어나고 장사꾼으로 죽었다. 종교적 열망으로 가득 찼던 십자군 원정 도중 그리스도 형제의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것도 돈 때문이었다. 중국계 미국인 경제사학자 황런위는 베네치아를 '현대 자본주의의 원류'로 꼽았다.
△환경이 문화를 규정한다고 했던가(마빈 해리스 '문화의 수수께끼'). 아만족을 피해 목숨은 건졌으나 소금과 생선밖에 없는 불모 지역에서 그들이 선택한 것은 장사. 후추 등을 소아시아에서 사서 유럽에 파는 해상중개무역으로 번영을 누렸다. 오스만투르크와 서방연합이 자웅을 겨룬 레판토 해전에서 기독교 세계에 승리를 안겨준 것도 베네치아 국영조선소에서 계획 건조된 최신 갈레온선박이었다.
△베네치아가 천년 공화국의 부활을 꿈꾸며 분리독립을 추진 중이다. 지역 정당과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독립을 묻는 인터넷 주민투표를 실시한 것. 결과는 뻔하다. 절대적 찬성. 1866년 제3차 독립전쟁 이후 이탈리아왕국에 귀속된 베네치아가 독립을 원하는 이유도 돈에 있다. 가난한 남부를 위해 중앙정부에 내는 세금 200억유로면 더 잘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투표는 법적 구속력이 없기에 독립이 실현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남의 일 같지 않다. 남북이 통일되면 재분리를 원하는 남쪽 사람들은 없을까.
/온종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