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풍속인물화 통해 엿본 조선의 풍광·정취

16~30일 간송미술관 가을 정기전<br>신윤복 '연소답청'등 명작 100여점 전시<br>그 시대 이념과 함께 화풍의 변천 한눈에

혜원 신윤복 作 '연소답청'

진달래꽃이 피는 봄철, 귀족 자제들은 말 위에 기생 하나씩을 끼고 연소답청(年少踏靑:젊은이들의 봄나들이)을 떠났다. 보라색과 옥색 천으로 발 굵게 누빈 저고리에 향낭을 달아차고 한껏 멋을 부렸다. 뒤로 젖힌 두루마기 아래로 붉은색과 녹색의 장식 주머니가 어른어른 보인다. 춘기에 취한 이들 한량은 유교적 사회질서와 남존여비의 엄격함까지 놀리고 싶었나 보다. 천민인 기생을 말 위에 앉히고 자신들은 노예를 자처하고 말에서 내렸다. 기생의 시중을 들고 담배에 불을 붙여 대령하는 게 마냥 재미나다. 가는 허리 아래 긴치마와 그 밑으로 외씨 같은 발을 드러낸 세련된 한복미인은 도도하게 이 시간을 즐긴다. 말을 몰아야 하는 진짜 시종만 어쩔 줄 몰라 동동거릴 따름이다. 조선 후기 문화의 황금기에는 귀족의 호사도 극에 달했다. 혜원 신윤복의 그림에는 이 같은 풍류정신이 진하게 배어있다. 가야금 소리를 들으며 연꽃을 감상하는 '청금상련', 맑은 강에서의 뱃놀이를 그린 '주유청강'이 그랬고, 시냇가의 아낙들을 훔쳐보는 '계변가화'나 야간 통금을 무릅쓰고 밀애를 감행하는 '야금모행'은 아슬아슬한 수위를 넘나든다. 혜원의 파격적인 그림들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성리학적인 세계관이 점차 이완돼 나타난 변화된 생활감각과 정서가 반영된 것이었다. 절제와 금욕주의, 남녀유별을 강조하던 성리학이 점차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정과 감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변화한 까닭이다. 일년에 딱 두 번 봄과 가을에만 문을 여는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오는 16~30일 올해 가을 정기전으로 '풍속인물화대전'을 마련했다. 안견(1418~?)에서부터 이당 김은호(1892~1979)에 이르기까지 조선왕조가 배출한 52명의 화가가 그린 인물풍속화 100여 점을 한자리에 모아 그 변천사를 살폈다. 인물풍속화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사람 뿐만이 아니다. 시대를 관통하는 이념까지 만날 수 있다. 남중국의 주자성리학을 받아들인 조선 전기에는 중국식 화풍을 모방한 작품들이 많았다. 그러다 율곡 이이(1536~1584)에 의해 주자성리학이 조선성리학 이념으로 발전하면서 문화 전반에서 조선 고유의 색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선 문화의 전성기는 겸재 정선(1676~1759)에 이르러 다져졌다. 겸재의 작품 속 인물들은 소박한 조선의 옷을 입고 당시 백성들의 삶을 담백하게 보여준다. 나무꾼이 땔감을 운반할 때 사용했던 지게가 그림에 등장한 것도 겸재의 '어초문답(漁樵問答)'이 처음이었다. 이는 조선 성리학의 이념을 토대로 우리의 자연과 사회를 우리만의 개성 있는 화법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진경(眞景)풍속'이라는 화풍까지 형성하게 된다. 겸재의 뒤를 이은 관아재 조영석(1686~1761)은 풍속화의 기틀을 다졌다. 이들 사대부 화가들에 의해 시작된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1745~1806), 긍재 김득신(1754~1822), 혜원 신윤복(1758~?) 등 화원 화가로까지 확산되면서 조선의 풍속화풍은 절정에 이르렀다. 단원 김홍도는 소를 타고 나뭇짐을 지고 가는 순박한 시골 소년의 모습을 묘사한 '기우부신(騎牛負薪)'이나 어느 봄날 젊은 선비가 말 위에서 꾀꼬리 소리를 감상하는 '마상청앵(馬上聽鶯)' 등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전해준다. 투전판, 대장간, 타작하는 마당 등 그가 남긴 그림들은 당시 생활을 추측하게 하는 사료로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조선 말기로 접어들면서 무분별하게 밀려든 청대 말기의 인물화풍의 유행으로 100여 년 넘게 화려하게 꽃피었던 조선풍속화도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옛 사람들의 정취와 당시의 풍광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지만 동시에 시대를 주도하는 이념의 변천사가 그림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 있다.(02)762-0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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