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6월 23일. 첫 직장이 있던 서울 북창동의 술집을 전전하던 오석송(58ㆍ사진) 회장은 약국을 돌며 수면제를 3알, 5알씩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곤 소주를 사들고 무작정 아버지가 묻힌 경기도 송추에 있는 운정공원묘지로 향했다. 눈 앞에 그간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새벽 4시. 정신이 번뜩 들었다. 숙취에 덜 깨 주변을 둘러보다 돌연 죽음에 대한 공포가 몰려왔다. 그는 "공포를 털어내려고 두 팔을 올리고 있는 대로 소리를 질렀더니 기가 몸 안에 꽉 차는 느낌이었다"며 "죽으려고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죽을 각오로 살아보자는 결심이 섰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오 회장은 마지막 기회를 잡기 위해 일어섰다. 1993년 고등학교 동창들이 마련해준 자본금 5,000만원으로 충북 청주에 보증금 1,000만원, 월세 60만원짜리 지하 1층 작업장을 얻었다. 이게 바로 세계 8대 생분해성 봉합원사 기업의 하나인 메타바이오메드의 시작이다.
1973년 선린상고를 졸업한 그는 추천으로 은행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도 마다하고 중견기업 입사를 택했다. 군복무 시절에는 카네기의 '인생론'을 읽으며 키웠던 큰 꿈을 품었다.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대학을 마치고 '재무통'으로 성장하는 중에도 그는 무작정 이태원을 드나들었다. 영어를 배워야 기회가 온다고 믿었기 때문. 그러다 친해진 미국인이 한국슈어프로덕트의 대표였다. 그는 오 회장을 눈여겨보다 임원으로 스카우트했다.
하지만 격렬한 노동운동에 부딪히자 미국 본사와 국내 법인 경영진은 '무조건 폐업'을 선언했다. 그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충치치료제 분야에서 기술력과 인지도를 갖춘 이 회사가 정상화만 된다면 따라올 곳이 없겠다는 욕심과 이대로 수많은 사람들의 일터가 사라져서는 안 된다는 공명심이 교차했다.
아파트를 팔아 마련한 1억원과 대출 2억원 등 가진 돈을 몽땅 털어 인수자금을 끌어 모았다. 1987년 한국슈어프로덕트의 대표로 취임한 그는 마침내 꿈을 이루는 듯 보였다. 하지만 6개월간 시간을 주겠다던 노조는 인수 3개월째 접어들자 다시 쟁의에 돌입했다. 생산차질은 둘째 치고 가족들의 고통이 심했다.
당시 살고 있던 아파트 1층에 빨간 페인트로 '오석송, 미국의 앞잡이'라는 글자가 범벅이 되자 초등학교 4학년, 1학년이었던 딸아이들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결국 그는 백기를 들었다. 인생에서 첫 번째 실패였다.
1990년 그는 재기를 노리며 인도네시아로 날아갔다. 인건비가 낮은 나라에서 다시 한번 승부를 건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만만치 않았다. 그는 "생산성이 턱없이 낮았다"며 "더구나 치과의사들은 '메이드 인 인도네시아(Made in Indonesia)'치과재료는 사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두번째 실패를 한 그는 인도네시아에 간 지 3년만에 결국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고교 동창들의 도움으로 메타바이오메드를 세워 세번째 도전에 나선 오 회장은 철저히 해외시장을 뚫는 데 집중했다. 공장장, 경리, 해외영업 등 1인5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중국시장을 개척하는 2년간은 독한 백주를 100병도 넘게 마셨다.
1998년 외환위기는 그에게 기회를 줬다. 달러당 800원하던 환율이 1,900원까지 뛰자 수출이 날개를 달았다. 지하공장 옆건물이 헐값에 나오자 그는 연구소부터 차렸다. 연구개발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에서다. 2001년 결국 지금의 회사를 있게 한 생분해성 봉합원사 개발에 성공했다.
현재 메타바이오메드는 생분해성 봉합원사, 치과용 기자재, 인공뼈 등 의료소재 분야에서 세계적 강소기업으로 성장했다. 생분해성 봉합원사 기술을 보유한 회사들은 존슨앤존슨 계열인 에티콘, 타이코헬스케어, 삼양사 등 세계 7개 밖에 없다. 모두 쟁쟁한 대기업이다. 2008년에는 회사를 코스닥에도 상장시켰다. 지난해 매출은 252억원으로 95%는 해외에서 거둔다.
오 회장은 아직도 매일 아침 4시30분에 일어나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일년 중 100일은 해외출장길에 오른다. "내게 가족, 회사의 직원, 주주 등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달려 있다"며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는 것. '삼세판'만에 오뚝이처럼 성공한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세운 결심을 아직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