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 나라보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처방을 충실히 따른 한국은 일단 위기 탈출에는 성공한 듯한 모습이다. 동아시아 금융위기의 원인이 국제금융자본의 장난이라며 아예 문을 걸어닫고 독자생존을 모색한 말레이시아도 현재까지 잘 버티고 있다. 물론 자립경제가 가능한 말레이시아와 달리 한국은 IMF의 처방을 외면할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어느 쪽이 옳은 길을 선택했는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한국과 말레이시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마하티르 수상 중 누가 역사의 평가를 받을지는 지금부터 하기 나름이다.현 상황에서 우리가 관심을 쏟아야 할 부분은 말레이시아와의 비교가 아니다. 그보다는 IMF 위기의 재연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특히 최근 대우사태로 인해 최악의 경우 97년 상황이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않다.
IMF위기는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묘한 속성을 갖고 있다. 중남미의 사례가 IMF의 반복성을 잘 보여준다.
20세기 초반 아르헨티나는 세계 6위의 일인당 국민소득을 자랑하던 부국(富國)이었고 브라질은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부상될게 확실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멕시코도 20세기 중반에 이미 공업화에 착수한 신흥개발국의 선두 주자였다.
그러나 이들 중남미 국가는 70년대 석유파동으로 흔들리더니 80년대초반 구조적 취약성이 부각되면서 외환위기에 직면, IMF 구제금융을 받는 처지로 전락했다. 문제는 IMF위기에서 벗어나는 듯하던 이들 국가가 5~7년 주기로 꼬박꼬박 IMF에 손을 벌리는 IMF의 단골손님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이다.
학자들은 중남미 IMF사태 반복의 원인으로 ①개혁의 미흡 ②거품경제의 재연 ③정치논리가 지배하는 경제 ④뿌리깊은 부패구조 ⑤국제 투기자본에 대한 미흡한 대처 등을 꼽고 있다. 기업가·노동자·관료의 기득권 집착으로 개혁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공적자금을 투입한 금융개혁은 외형만 그럴듯하게 개선했을뿐 금융시장의 선진화로는 이어지지 못한 개혁의 미완성. 위기를 탈출하는 듯한 모습만 보이면 「이젠 됐다」며 다시 나타나곤 하는 거품경제. 멕시코의 외환위기가 대통령선거때마다 나타난데서 알 수 있듯 「표」에 집착하는 경제정책. 자원배분을 왜곡시키는 뿌리깊은 부패관행. 이처럼 불안한 경제구조를 노리는 국제 투기자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안방을 투기자본의 놀이터로 내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는 분석이다.
지금 우리는 IMF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의기양양해 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터널 중간에서 어둠에 조금 익숙해져 주위 사물이 보이기 시작한 것을 터널에서 벗어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중남미 위기반복의 원인을 우리 상황과 비교해 보면 아찔하다.
李世正 산업부 차장BOBLEE@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