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 금감원 개혁의 포퓰리즘

야단법석(野壇法席)이다. 부처님 오신 달을 기리는 종교 행사가 아니라 금융감독원을 두들겨 패는 야단법석이 한창이다. 청와대의 지대한 관심 속에 학자와 언론은 연일 금감원 비판에 바쁘다. 당연하다. 금감원이 보여온 행태는 단죄받아 마땅하다. 분노하는 국민도 많다. 관행으로 굳어진 부패구조를 이 기회에 척결해야 함도 시대적 소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찜찜하다. 이성보다는 감정이, 각계의 의견 수렴이라는 절차보다는 여론을 의식한 졸속이 앞서기 때문이다. 정치논리가 끼어들었다는 논란도 없지 않다. 무엇 때문에 금감원 개혁이 한쪽 방향으로만 숨 가쁘게 진행되고 있을까. 세 가지 요인이 뒤섞인 결과로 풀이된다. 졸속이 우려되는 개혁 첫째는 금감원의 죄질이 워낙 나쁘다는 점이다. 특히 저축은행의 영업정지 직전에 VIP 고객들이 예금을 미리 빼내가는데 현지에 파견된 금감원이 방조했다는 정황은 어떤 변명도 통할 수 없는 직무유기에 해당된다. 언론보도 뒤에도 금감원이 발뺌과 말 바꾸기를 반복했다는 점 역시 신뢰를 더욱 더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두 번째 요인은 질시. 금감원 직원들이 퇴직 후에도 금융회사의 감사자리를 보장받고 비리에 연결됐다는 점이 국민적 공분을 일으킨 바닥에는 고액연봉을 받는 자들에 대한 질시가 깔려 있다. 배고픔은 견딜 수 있어도 배아픔은 참을 수 없는 질시의 습성이 포퓰리즘과 결합할 것 같아 걱정스럽다. 세 번째 요인은 희생양이 필요했던 분위기다. 감독당국의 도덕 불감증 정도로 마무리됐을 법한 평소와 달리 파장이 거듭되는 이유는 한마디로 설명이 가능하다. 대통령의 분노와 질타. 만약 대통령이 금감원을 전격 방문해 근본적인 개혁을 주문하지 않았다고 생각해보자. 금감원 개혁이 이토록 추진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금감원을 향한 대통령의 질타에 4ㆍ27 재보선 패배로 확인된 흐트러진 민심을 달래려는 복선이 깔렸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두 가지다. 개혁이 시대적 명제로 떠올랐으며 금융감독 당국은 가위눌린 채 얼어붙었다는 사실이다. 개혁은 반길만한 일이 분명하지만 걱정이 앞선다. 방향과 속도에 의문이 가기에 그렇다. 무엇보다 금감원의 언로가 비정상적으로 봉쇄된 상황이 온당치 않다. 20여년간의 논의를 거친 끝에 지난 1997년 외환 위기를 겪는 와중에서 어렵사리 구축된 현재의 금융감독 시스템을 불과 한 달 만에 고치겠다는 발상도 기가 막힌다. 단시일 내에 끝냈다는 미국의 금융감독 개편도 1년 반의 시일이 걸렸다. 금감원 속죄양은 안될 말 보다 본질적으로 금감원 사례는 빙산의 일각이다. 낙하산이 어디 금감원뿐인가. 공기업과 금융회사의 수장 또는 감사 자리를 자기 몫으로 여기는 정치권과 정부, 감사원과 한국은행은 어떻게 개혁해야 할까. 퇴임 후 로펌에 몸을 담은 관료들이 초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특정집단을 위한 로비스트로 활동하다 다시 장관직에 오르는 도덕적 해이는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기왕에 시작된 개혁이 졸속으로 흐른다면 아니함만 못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한다면 전반적인 부패구조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기회다. 이를 위해서는 광범위한 합의가 필요하다. 최근의 금감원 개혁 논의에 선뜻 수긍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금융감독시스템에 이상이 발견됐다고 해서 충치로 여길 수는 없다. 대불공단의 골칫거리였다는 전봇대와도 다르다. 금융은 복잡할 뿐 아니라 국민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어느 부문보다 지대하다. 금감원을 속죄양으로 삼으려는 포퓰리즘이 혹여 끼어있다면 개혁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시간과 의견수렴 노력이 필요할 때다. 급할수록 천천히 가자. 만만디(慢慢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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