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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이 만난 사람] 오원철 前 대통령 경제수석

"즉흥적 개발계획 아닌 백년대계 구상 세워야"<br>앞으로 50년을 먹고 살려면 행정도시·4대강 같은 문제로 지금처럼 갑론을박 해선 안돼<br>이견 있다면 더 토론하고 고민, 인구문제 등 거시적 계획을



SetSectionName(); [서경이 만난 사람] 오원철 前 대통령 경제수석 "즉흥적 개발계획 아닌 백년대계 구상 세워야"앞으로 50년을 먹고 살려면 행정도시·4대강 같은 문제로 지금처럼 갑론을박 해선 안돼이견 있다면 더 토론하고 고민, 인구문제 등 거시적 계획을 대담=우현석 문화레저부장 hnskwoo@sed.co.kr 정리=김지아기자 tellme@sed.co.kr 사진=이호재기자 ImageView('','GisaImgNum_1','default','260'); ImageView('','GisaImgNum_2','default','260');

"앞으로 10년, 20년, 50년을 먹고 살려면 즉흥적인 개발계획이 아니라 거시적이고 구체적인 구상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행정복합도시나 4대강 같은 문제로 이렇게 갑론을박해서는 안 됩니다. 행정도시도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이견이 있다면 더 토론하고 고민해서 백년대계에 걸 맞은 계획과 실천을 해야 합니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오 국보(國寶)'로 부르며 중용하던 오원철(83) 전 대통령 경제수석은 세월을 잊고 사는 듯했다. 질문 하나를 던지면 20~30분씩 격정적인 답변을 토해내 받아 적는 기자를 지치게 했다. 이북 억양이 강한 목소리는 카랑카랑 했고 얼굴에는 검버섯도, 주름살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경제개발을 시작한 지 50년, 서울경제신문이 창간된 지 50주년 되는 해입니다. 경제개발의 첫 삽을 뜨신 그때와 지금의 우리나라를 바라보는 감회가 어떻습니까. ▲(한 일간지의 인터뷰 기사를 보여주며) 이 기사 읽어봤습니까. 이 사람은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지난 개발연대에 경제학자를 지냈습니다. 중화학공업을 극렬하게 반대하던 사람입니다. 나를 고의적으로 괴롭히려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지요.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인터뷰를 하는 게 말이 되는가 싶어요. 허 참, 세상이 그만큼 바뀐 건지…. -오 전 수석께서 집필하신 책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을 만들었나'의 서문을 보면 이 글은 '대통령의 측근 입장이다. 나는 그의 공과에 대해 논할 처지는 아니다 '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특별히 이 같은 전제를 하신 이유는 뭔가요. ▲우리 같은 사람을 '테크노크라트', 기술관료라고 합니다. 모든 일을 사실적인 계획을 세워놓고 뛰는 부류요. 이런 지적(방금 보여줬던 기사를)을 하는 것은 경제학자나 대학교수에게 필요한 것이지 나 같은 행정가에게는 필요 없다는 얘기지요. -지난해 세계적인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경을 잘 헤쳐나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떻게 보십니까. ▲그것도 기본적인 얘기인데, 우리나라는 늘 외화 고갈에 시달렸습니다. 1차 5개년계획 때도 달러가 없었지요. 그때가 첫 번째 외환위기인데 독일에 가서 외자를 끌어왔지요. 두 번째 외환위기가 1970년대 초 오일쇼크 때인데 중동으로 나가서 외화를 벌어왔어요. 우리나라의 위기는 늘 외화 고갈에서 출발했어요. 이번에도 외화 고갈이 문제였다고 봅니다. 우리나라는 외화 없이는 의식주를 해결할 방법이 없는 나라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난 50년간 경제발전의 터를 닦은 주역으로서 앞으로 향후 50년간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무얼 먹고 살아야 할까요. ▲1978~1979년에 만든 2000년대 국토 구상이 있어요. 당시에는 그 계획에 따라 경제를 꾸려가려고 했어요. 이런 서류를 보고하면 박 대통령은 그냥 결재하는 게 아니라 꼭 읽어보고 결재를 하셨지요. 박 대통령 서거 후에 집무실에 가보니 '2000년대 국토구상'과 '2000년대 기본구상 보고서'가 서재 탁자에 올려져 있더군요. 그 옆에는 스탠드와 돋보기도 있었고. 밤 새워 읽으셨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때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이걸 집행했을 거요. 여기에는 국토활용부터 인구문제까지 기본적인 계획들이 다 담겨 있어요. 지금 정부가 이런 구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요. 없으면 지금부터라도 빨리 만들어 추진해야 합니다. 행정수도나 이런 것들도 딱 결정해서 추진 하게끔 해야지 이제 와서 수정하느냐, 마느냐로 갑론을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중에서도 가로림만(加露林灣) 프로젝트가 사장된 게 가장 아쉬워요. -가로림만 프로젝트가 어떤 건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죠. ▲태안반도의 가로림만은 서해가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해역임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20만톤짜리 배가 들어올 수 있는 곳입니다. 천혜의 입지를 가진 곳이지요. 싱가포르 같은 무역ㆍ투자 자유도시를 이곳에 만들자는 구상이었습니다. 싱가포르 두 배의 크깁니다. 여기는 관세 없이 공용어도 영어를 쓰게 하려고 했지요. 당시 천도를 계획했던 현재의 행정도시와도 가까웠어요. 그는 인터뷰 중간중간 가로림만 프로젝트와 당시 천도계획에 대한 자료들을 쇼핑백에서 꺼내 기자들에게 설명했는데 그 자료는 당장 실행해도 될 만큼 구체적이고 세밀했다. -왜 그 프로젝트가 이후 정부로 연결되지 않았을까요 ▲안목 없는 사람들이 대통령을 했으니 그렇지요. 이명박 대통령도 처음부터 4대강에 집중하다가 타이밍을 놓쳤어요. '싱가포르와 똑같이 할 테니 투자할 사람은 오라'는 구상이었지요. 청주공항을 만든 것도 이것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앞으로 나올 대선 후보가 고민해야 할 겁니다. 준비기간을 3년, 대통령 임기 5년, 퇴임 후에도 2년은 걸릴 거예요. 지금같이 후다닥 할 거면 하지 않는 게 낫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행정수도도 우리가 세웠던 지역에서 오른쪽으로 비켜나갔어요. 차라리 다행이지요. 당초 계획대로 이행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그 자리 가운데에는 아무것도 짓지 않는 게 나으니까요. -오 수석께서는 방위산업의 자립에도 크게 기여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책에는 박 전 대통령이 율곡사업에 대한 감사를 철저히 했다고 기록돼 있는데 훗날 율곡사업이 비리로 얼룩진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때는 비리가 없었어요. 그 후에 일어난 일이지요. 율곡사업은 두 가지요. 하나는 국내 생산 방산물자 구입, 또 하나는 해외 구입이지요. 우리 때는 원가계산이 엄격히 하게 돼 있었어요. 거기에 적정이윤을 플러스해서 줬지요. 그것을 법으로 정해놓았습니다. 부정이 나온다면 가격책정이 적정한지에 관한 것이지요. 문제는 외국산 무기인데 우리 때는 오퍼상을 배제했습니다. 그때는 철저했어요. 그럼 누가 구입하느냐. 사용 담당자를 구매하라고 보냈지요. 자신이 직접 장단점을 비교하고 선택도 본인이 하라고 했어요. 그 사람이 해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국방부 내에 법무관을 대동시켰어요. 그외에도 부정방지 장치를 이중삼중으로 해놓았었지요. 애초 한 시간 남짓 계획했던 인터뷰는 세 시간이 가까워지도록 끝날 줄을 몰랐다. 못다한 일에 대한 아쉬움이 배어 나왔다. '그래서 그에게 끝내지 못한 일들이 아쉽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아니 그렇게 일했으면 됐지. 거기서 더 하느냐"며 팔순이 무색한 벽력 같은 목청으로 대답했다. 나이 같지 않은 정력이 신기해 "건강유지 비결은 뭐냐"고 묻자 "당신 같은 젊은이들을 구박하면서 살면 안 늙는다"고 일갈했다. ◇약력 ▲1928년 황해도 풍천 ▲1945년 경성공업전문학교 입학 ▲1951년 서울대 공과대학 화학공학과 졸업 ▲1957년 공군 소령 전역 ▲1957년 시발자동차 회사 공장장 ▲1960년 국산자동차주식회사 공장장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조사위원회 조사과장 ▲1970년 상공부 차관보 ▲1971년 대통령 경제 제2수석비서관 ▲1974년 중화학공업기획단 단장 ▲1992년 기아경제연구소 상임고문 ▲1998년~현재 한국형 경제정책연구소 상임고문 60년대 주요 산업정책 입안하고 집행박정희 前대통령이 '오 國寶'라 불러 ■오원철 前수석은 오원철 전 수석은 박정희 정권 때 경제 제2수석 비서관으로 활약한 테크노크라트(Technocratㆍ기술관료)로 급속한 경제성장을 시작하던 1960년대 주요 산업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한 인물이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박 대통령으로부터 근정훈장을 수여 받았고 박 대통령은 그를'국보'와 같은 존재라며'오 국보'라고 부를 정도였다. 28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그는 45년 경성공업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46년 경성공업전문학교가 서울대학 공과대학으로 개편된 후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공군 기술장교 후보생 시험에 응시하여 공군소위로 임관한다. 한국전쟁 당시 부친은 남쪽으로 내려왔지만 모친과 여섯 동생은 북한에 남아 그는 가족과 헤어졌다. 전역 후 그는 한국 최초의 자동차 회사인 시발자동차회사의 공장장으로 부임하며 첫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1960년 시발자동차회사가 운영난에 빠지자 국산자동차주식회사 공장장으로 자리를 옮겨 이듬해 5ㆍ16이 일어날 때까지 근무하던 그는 61년 5월 군사정부에 소환돼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조사위원회 조사과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상공부 화학과장으로 발령받은 그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화학공업 부문을 입안했고, 정유공장과 비료공장ㆍ시멘트 공장 관련사업을 추진했다. 1964년 정부의 정책방향이 수출제일주의로 전환된 이후 그는 경공업 분야를 담당하는 상공부 공업 제1국장으로 임명받아 수출제일주의 전략을 직접 실행했다. 이때 그는 섬유 공업을 비롯한 경공업의 수출산업화와 중소기업 육성의 실무책임을 맡았다. 또 1970년에는 차관보로 승진, 울산 석유화학공업단지를 건설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1971년 경제 제2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된 그는 박 대통령에 의해 방위산업 육성의 총 책임을 맡기도 했다. 김지아기자 tellme@sed.co.kr [서경이 만난 사람] 전체기사 보기 혼자 웃는 김대리~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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