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배상 문제라는 한일 외교 현안에 일본의 재계 단체들이 이례적으로 공식 입장을 표명하고 나서면서 최악의 국면에 빠진 한일 외교관계에 이어 양국의 경제적 유대까지 파국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금까지 한일 기업인들은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역사 발언 등으로 양국 관계가 아무리 얼어붙어도 경제활동만은 정치와 철저하게 분리해 왔으나, 일본 경제단체들이 민감한 외교 현안에서 일본 정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나섬으로써 한일 갈등이 경제적으로 비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이 같은 이례적인 움직임에 대해 일본 경제계는 "사태를 해결하고 경제관계 악영향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정경분리원칙을 깨고 경제단체들까지 나서 민감한 현안을 언급한 것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번 일본 경제계의 입장 표명 이유로는 우선 한국 사법당국의 잇단 강제징용 관련 판결로 관련 소송이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압력용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최근 니혼게이자이신문은 한국 법원이 일본 기업들에 대해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내놓고 있는 데 대해 한국 정부가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어 일본 기업들의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한국 정부는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는 명확한 입장 표명을 하지 않고 있다. 6일 외교부 관계자는 "청구권 문제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사법적인 문제로, 정부 차원에서는 일단 기다려 보자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본 경제계는 아베 신조 정권의 역사인식과 극우 행보에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박근혜 정부가 강제징용 문제에 있어서 일본 기업들에 대한 공세 입장으로 돌아설 경우, 22만명으로 추산되는 징용 피해자들의 줄소송과 기업에 대한 자산 억류 사태 등이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신문은 새누리당 이명수 의원이 제시한 일본의 강제징용 동원 기업에 미쓰비시나 신일철주금 뿐 아니라 파나소닉 등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 299개사가 포함돼 있다며, 징용 배상 사태가 확대될 경우 한국의 '컨트리 리스크(country risk)'가 크게 고조될 것이라고 재계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해 전했다.
일본 기업들의 이례적인 행보는 극우성향을 보이는 아베 정권과 보조를 맞추기 위한 움직임으로도 보인다. 아사히신문은 지난 1일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위자료 배상 소송에서 패소한 미쓰비시가 즉각 항소 방침을 밝힌 데 대해 "매출 3조엔에 달하는 기업 규모 면에서 배상금이 부담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외교적으로 대응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해석했다. 즉, 배상 판결에 대한 불복은 기업으로서의 판단이 아니라 "정부와 판단해 대응할 사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엔저 유도정책과 법인세 인하 방침 등 '아베노믹스'를 강력히 지지하는 경제계가 한국, 중국 등 아시아 외교관계에서 궁지에 몰려 있는 아베 정권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나선 셈이다.
문제는 극우성향의 아베 정부가 한 치 양보도 없는 강경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사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6일 요미우리신문은 아베 정권 내부에서 연일 역사문제와 관련해 대일 비난을 이어가는 한국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고 있다며, 동아시아 외교에서 한국보다 중국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한국의 주장은 감정론일 뿐, 냉정한 논의는 당분간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아베 총리 주변에서 나오고 있다며, 차라리 중일관계 개선에 힘을 실어야 한다는 쪽으로 정부 내 의견이 흘러가고 있다고 전했다.
이처럼 아베 정부가 한일관계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역사인식 재고는 등한시 한 채 한국을 문제 삼으면 경제관계 급랭은 불가피하다. 아사히신문은 아직까지는 강제징용 소송에서 패소한 미쓰비시나 신일철주금도 소송에 대한 대응이 당장 한국 기업과의 거래에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보고 있지는 않지만, 한국의 반일감정이 일본제품 불매운동이나 관광객 급감 등으로 이어지는 데 대한 산업계 전반의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