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프랑스 여행을 갔을 때다. 파리 북부역에서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직원에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 영어로 물어봤다. 그러자 분명 영어 같은데 전혀 알아듣지 못한 말이 쏟아졌다. 안되겠다 싶어 옆에 지나가던 이에게 통역을 부탁했더니 '어딜 찾느냐'는 질문이었단다. 한국식 영어를 사용하는 여행객과 프랑스식 영어의 직원이 같은 질문을 서로에게 하고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이 봤으면 얼마나 웃겼을까. 아내는 두고두고 '콩글리시와 프랑글리시의 환상적 만남'이라고 놀려댔다.
△말이란 게 참 오묘하다. 대화가 될 때는 쉽고 편하기만 하지만 막히면 이것처럼 답답하고 불편한 것도 없다. 말로 안되면 몸짓이라도 소통이 돼야 하는데 달을 가리켰더니 손가락만 바라본다면 속이 탈 수밖에 없다. 전설 속의 바벨탑을 쌓다가 하루아침에 달라진 언어로 뿔뿔이 흩어졌던 인간들의 심정이나 '배추 값이 올랐으니 양배추를 식단에 올리라'던 전직 대통령을 바라보며 느껴야 했던 서민들의 허탈함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소통이 안돼 마음이 한번 닫혀버리면 제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되돌리기 힘들다. 그래서 불통은 항상 편견이라는 불청객과 함께 찾아오곤 한다. 장 자크 루소의 '참회록' 속 공주가 말했던 '배고프면 빵 대신 브리오슈(케이크의 일종)를 먹어라'라는 말이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것으로 둔갑한 이면에는 국민의 생활고를 직시하지 못한 왕실에 대한 잠재적 분노가 자리 잡고 있었는지 모른다.
△요즘 일부 네티즌 사이에 ''라는 말이 돌아다니고 있는 모양이다. 창조경제를 희화화한 '참죠, 경제'라는 용어도 떠돈다. 대통령과 정부 여당 입장에선 불통과 안녕하지 못한 사회의 책임을 혼자 뒤집어쓰는 게 억울하다고 여길 터이지만 비판까지도 포용해야 하는 게 정치이고 위정자의 몫 아니겠나. 말이 안 통하는 대상 역시 어느 일방이 아니라 야당이나 노조를 포함한 우리 사회 전부일 수도 있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