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K팝에서 시작된 한류 열풍이 클래식과 발레로 이어지며 세계 무대를 주름잡고 있다. 'K클래식'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같은 돌풍의 중심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들이 있다. 세계 3대 콩쿠르 중 하나인 제14회 차이콥스키 국제콩쿠르에서는 피아노ㆍ성악ㆍ바이올린 부문을 한국인 5명이 석권했는데 그 중 4명이 한예종 출신이다. 국제적 명성을 가진 제6회 시칠리아국제발레콩쿠르에서도 한예종 출신의 한국 무용수 10명이 상을 휩쓸었다. 무용원 현대무용 출신이 주축을 이룬 LDP(Laboratory Dance Project) 무용단은 미국 최고(最古) 역사를 자랑하는 제이콥스 필로 댄스 페스티벌에 한국 단체로는 처음으로 초청받았다. 클래식과 무용뿐만이 아니다. 연극과 영화 분야에서도 한예종 출신의 작가ㆍ연출가ㆍ감독 등이 신선한 감각과 탁월한 작품성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지난 1992년 문을 열어 내년에 성년이 되는 한예종은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졸업한 졸업생들이 문화예술 전 분야에 걸쳐 눈에 띄는 성과를 내면서 설립 20여년 만에 공연ㆍ영화계의 핵심 축으로 떠오른 셈이다. ◇클래식=한예종 음악원은 최근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를 석권한 데서 보듯 그동안 누적돼온 실력을 선보이며 '성년'으로서 기량을 뽐내고 있다. 올해만 해도 7개의 국제 콩쿠르에서 10여명의 한예종 출신 음악인들이 상을 휩쓸었다. 한예종 활약의 배경에는 어렸을 때부터 집중적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열정을 쏟은 교수진 덕분이라는 분석이다. 김대진 교수는 유명 피아니스트 김선욱을 비롯해 이번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피아노 부문에서 2위를 수상한 손열음 등을 키워냈다. 김선욱과 손열음은 12살 때부터 김대진 교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최근 두각을 나타내는 바이올리니스트 신현수, 클라라 강(강주미) 등은 모두 김남윤 교수를 거쳐간 제자들이다. 전주 출신인 신현수는 초등학교 때부터 서울을 오가며 김남윤 교수를 사사했다. 순수 국내파인 신현수가 프랑스 롱티보 콩쿠르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김남윤 교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클라라 강의 경우 베를린 한스아이슬러 음대를 거쳐 2004년 한예종으로 '역유학'을 온 이색적인 경우다. 이번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남ㆍ녀 성악 부문 1위를 휩쓴 데는 최현수 교수의 공로를 빠뜨릴 수 없다. 최현수 교수도 1990년 이 콩쿠르에서 우승했던 터라 '대를 이은' 우승으로 화제를 모았다. 서선영은 최현수 교수에게 배우기 위해 3년간 그의 레슨을 참관만 했을 정도로 그에게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강했다고 한다. 5월 열린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한 소프라노 홍혜란 역시 최현수 교수를 사사해 '성악 강국'의 면모를 과시했다. ◇무용=최근 세계 최정상 클래식 발레단인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은 한예종에 재학 중인 김기민의 입단을 받아들였다. 한국인은 물론 동양인이 마린스키에 입단한 것은 사상 처음이다. 역시 한예종 재학중인 박세은과 최영규는 5월 말 네덜란드국립발레단 입단을 통보 받았으며 특히 박세은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파리오페라발레단 준단원으로 입단 제의를 받아 오는 8월부터 프랑스에서 활동할 예정이다. 국내 대표 무용단체에서는 이미 한예종 출신들이 주역을 도맡고 있으며 이제 세계적인 발레단에서도 한예종 출신에 대한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는 것. 2009년 모스크바국제발레콩쿠르 시니어 부문 은상을 수상한 김리회는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정영재는 영국국립발레단에서 활약하다가 2009년 국립발레단에 입단해 다양한 작품에서 주역을 소화하고 있다. 황혜민은 2002년 유니버설발레단 솔리스트로 입단해 '백조의 호수' '라 바야데르' '심청' 등 주요 작품에서 활동하고 있다. 고전 발레뿐 아니라 현대 무용 분야도 한예종 돌풍이 거세다. 2001년 창단된 LDP 무용단은 신창호ㆍ이인수 등 한예종 현대무용 전공자들로 이뤄진 무용단으로 27~31일 미국에서 열리는 제이콥스 필로 댄스 페스티벌에 한국 단체로는 처음으로 공식 초청됐다. 몇 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 같은 성과가 가능해진 비결은 한예종의 탄탄한 교수진과 자연스러운 경쟁 시스템에 있다. 러시아 바가노바 출신의 김선희 교수, 파리오페라발레단 출신의 김용걸 교수, 한예종 학부를 졸업하고 워싱턴발레단에서 활동하던 조주현 교수 등이 발레과를 맡고 있으며 독특하고 창의적인 안무를 선보여온 전미숙 교수가 현대무용 전공자를 지도하고 있다. 김용걸 교수는 "글로벌 수준의 1세대 선배들이 교수 진용을 꾸리고 있는데다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학생들이 모여 있는 만큼 뜨거운 경쟁 속에서 서로 발전하는 구조가 정착돼 있다"고 설명했다. ◇연극=동국대ㆍ한양대ㆍ중앙대ㆍ서울예대 출신들이 주도하던 뮤지컬과 연극 시장 역시 한예종 출신들이 새롭게 뛰어들어 경쟁 구도를 만들고 있다. 대표 주자로는 추민주 연출가, 장유정 극작가 겸 연출가, 배요섭 연출가, 배삼식 극작가, 김은성 극작가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참신한 소재 발굴, 탁월한 연출력, 시대성과 강한 메시지를 응집한 작품성 등을 바탕으로 '한예종 전성시대'를 열어가는 주역이다. 한예종 출신으로 현재 극작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극단 우인의 대표인 김태웅 극작가는 영화 '왕의 남자' 원작인 연극 '이(爾)'가 그의 졸업작품으로 유명하다. 배삼식 작가는 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 연극 '열하일기만보'와 '3월의 눈', 뮤지컬 '피맛골연가', 총체극 '화선, 김홍도' 등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작품을 썼다. 배삼식 작가는 창작극과 번안극, 뮤지컬과 마당놀이, 동양의 고전과 서양의 비평이론 등 다양하고 이질적인 영역을 자기 방식으로 소화하는 단단함을 갖춘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창작 뮤지컬로는 보기 드물게 1,000회가 넘는 공연 기록을 세운 '빨래' '오! 당신이 잠든 사이' '김종욱 찾기' 등도 각각 추민주 연출가와 장유정 연출가의 한예종 졸업작품이 상업 무대에 올라 성공한 케이스다. 장유정은 '형제는 용감했다' '금발이 너무해' '김종욱 찾기' 등 히트작들을 쏟아내 뮤지컬계의 '미다스의 손'으로 통할 정도. 지난해에는 영화 '김종욱 찾기'에서 영화 감독을 맡으면서 영화 시장까지 진출했다. 추민주 연출가는 뮤지컬 '빨래'로 흥행 신화를 일궜으며 특히 한예종 출신들로 구성된 명랑씨어터 수박을 창단했다. 한예종 연극원은 연출가이자 극작가인 김광림, 김태웅과 박상현 등 현직 극작가들이 대거 포진해 있어 화려한 진용을 갖추고 있다. 아울러 창작 인큐베이팅 시스템을 정착시켜 작품 기획ㆍ생산ㆍ유통 등 전단계에 체계적인 지원이 이뤄지는 한편 과목을 세분화함으로써 각 분야에 걸친 전문가 집단을 양성하는 점도 평가할 만하다. ◇영화=중앙대와 한양대 연극영화과 출신들이 주류를 이뤄온 영화계도 한예종 영상원 출신들이 새롭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지난해 한국영화 중 최고 흥행 성적을 거둔 '아저씨'의 이정범 감독을 비롯해 재학 중에 '추격자'를 연출했던 나홍진 감독, 5월 데뷔작 '체포왕'으로 인상적인 신고식을 치른 임찬익 감독 등이 한예종 출신이다. 그동안 한예종 출신 감독들은 해외 영화제에서 입상하는 등 작품성을 인정받기는 했어도 흥행에 성공한 사례는 드물어 '예술영화학교'로만 인식돼왔으나 최근 들어 이들이 상업적으로도 기반을 다지고 있다. 한예종 영상원은 영화과 내에 연출ㆍ촬영ㆍ편집ㆍ음향ㆍ시나리오ㆍ기획 등이 나뉘어 특성화 교육을 받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분야별로 양성된 전문가들이 현장에서 함께 영화를 제작할 수 있게 된다. 나홍진 감독은 단편 영화 '완벽한 도미요리'부터 같은 영상원 출신인 이성제 촬영감독과 함께 작업해 '추격자' '황해' 등까지 이어졌다. 이정범 감독은 영상원 출신 박주강 사운드수퍼바이저와, '미쓰 홍당무'를 만든 이경미 감독은 박은교 시나리오 작가와 각각 작업했다. 임찬익 감독의 영화 '체포왕'에는 한예종 연극원 출신의 배우 이선균이 주연을 맡고 영상원 출신 조상윤 촬영감독이 참여했다. 교수진과 학생 간의 연결도 활발하다. 이창동ㆍ이승무 한예종 정규 교수진뿐 아니라 봉준호ㆍ박찬욱 등 유명 감독들이 강사로 초빙되기도 하고 이정범ㆍ이경미 등 한예종 출신 감독들도 학교에서 후배들에게 실무를 가르치거나 함께 작업한다. 재학 중에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에 시나리오 작업을 함께 한 심성보 작가, 박광수 감독의 지도 아래 감독으로 데뷔한 '백야행'의 박신우 감독 등이 대표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