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제도적 탐욕과 도덕적 해이를 억제할 장치가 없어 지금 세계는 초유의 전지구적 위기를 맞고 있다. 응급처방으로 나라마다 작은 정부, 국가부채의 축소를 추구하고 있지만 대응이 상투적이고 상상력도 고갈된 것처럼 보인다. 특히 작은 정부를 구현하기 위해 문화예산부터 줄이는 단견이 도처에서 목격된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문화를 불요불급한 사치쯤으로 여기는 풍토가 여전히 만연하다. 예술가, 연예인 출신의 정치인들이 급속히 늘고 있는 것과 문화예산의 축소는 피차 길항하는 현상이다. 문화를 산업으로 보는 경제적 통찰이, 문화의 산업적 가치를 인정하는 안목이, 그런 통찰과 안목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한테는 무엇보다 절실하다.
프랑스의 아비뇽 축제나 영국의 에든버러 축제를 한번 다녀와 보라. 그러고도 여전히 문화를 사치로 바라본다면 당신의 인식능력에 지독한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에든버러나 아비뇽이 딱히 다른 유럽의 도시들보다 관광자원이 많은 것도 아닌데, 이 작은 도시에 몇 십만명이 세계각지에서 몰려온다. 순전히 연극을 중심으로 한 공연예술을 보기 위해서다. 이들이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을 체류하며 지역 경제의 큰 부분을 충당해준다. 이 두 축제 때문에 프랑스와 영국이 누리는 국격의 가치는 돈으로 헤아릴 수조차 없다. 서울은 아시아에서 아비뇽이나 에든버러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도시이다. 대학로는 극장만 130개가 넘는 세계 유일의 연극 특구이다. 그런데 잘 나가던 서울국제공연예술제의 예산은 올해도 또 깎인 모양이다.
최근 한국의 연극이 전세계에서, 특히 유럽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오태석ㆍ이윤택ㆍ양정웅이 한국적 셰익스피어 연극으로 유럽 관객들을 사로잡아 연극에 대한 자존심이 상당히 강한 유럽에서 확고한 명성을 획득했다. 임도완ㆍ채승훈ㆍ이자람ㆍ남인우ㆍ배요섭ㆍ박정의 등 많은 중견예술가들도 한국연극의 심상치 않음을 국제무대에서 거듭 증명하고 있다. 한류가 K팝이나 드라마 등 대중예술에 머물러서야 국격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 정부는 문화예산을 줄이는 대신 위기 때 더 적극적으로 지원해서 아비뇽이나 에든버러처럼 공연예술을 산업화해 서울을 아시아의 문화수도로 만들고 국격을 높이는 일에 나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