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상품시장에서 공급자의 요구는 거의 횡포에 가깝다. 공급자들이 국제적으로 곡물과 원자재의 수요는 급증하는 데 비해 공급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호주의 광산업체 리오틴토는 철강회사들에 주는 장기계약물량을 줄이고 현물시장에 공급하는 물량을 세배나 늘리겠다고 밝힌 바 있다. 장기계약으로 거래하는 것보다 현물시장에 내놓을 경우 가격이 두배나 비싸기 때문이다. 한국ㆍ일본ㆍ중국의 철강회사들은 현물시장에서 철광석과 석탄을 살 바에야 장기계약을 하는 게 낫고 그러다 보니 지난해보다 2~3배에 가까운 가격 조건을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결국 수요자인 철강회사들은 채산성 악화를 겪을 수밖에 없고 자동차ㆍ가전ㆍ조선업계의 원가부담이 커지게 된다. 공급자 우위의 셀러스 마켓(seller’s market)은 가격의 고공행진을 유발한다. 쌀ㆍ밀 등 세계인의 주곡은 1년 사이에 두배나 인상됐고 전세계 곡물가격은 지난 3월에만도 57% 폭등했다. 문제는 이런 공급자 우위 시장이 당분간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세계은행은 세계적인 식품 가격 급등세가 장기적으로 지속될 우려가 크다고 경고하면서 “지난 2004년 수준을 넘어서는 곡물가격의 강세가 오는 2015년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글로벌 경기둔화 분위기 속에 국제유가 등 원자재 가격이 다시 상승세로 돌아선 것은 수급 불균형에 따른 셀러스 마켓이 워낙 강하게 형성돼 있음을 의미한다. 도이체방크의 아담 지민스키 에너지 담당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국제유가가 미국의 원유재고 감소에 급등했다는 것은 수급이 유가 형성에 중요한 요소인 만큼 국제원유 수요가 아직도 꺾이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원자재 수급 불균형은 뭉칫돈을 굴리는 투기세력이 가세해 원유ㆍ천연가스ㆍ구리 등 광물자원을 비롯해 쌀ㆍ밀ㆍ옥수수 등 곡물가격을 천정부지로 치솟게 하고 있다. 미국 씨티그룹의 분석에 따르면 올 1ㆍ4분기 원자재 투자가 5분의1 이상 늘어나 4,000억달러에 달했으며 인플레이션 및 달러 약세를 헤지(위험회피)하는 수단으로 원자재 인기가 갈수록 치솟고 있다는 것. 애널리스트들은 “원자재 투자 해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표현하면서 “이는 인플레이션을 심화시키는 추가 타격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씨티그룹 분석에 따르면 지난 1ㆍ4분기 원자재 투자에서 원자재 지수 쪽이 가장 많은 돈을 끌어 모아 400억달러 늘어난 1,850억달러에 달했다. 분기 증가분은 지난해 전체보다 많아 원자재 투자 열기를 뒷받침했다. ING 인베스트먼트 애널리스트는 “원자재 시장이 향후 위축되기도 하겠지만 오히려 투자기회라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그는 유가와 식량값 강세로 인한 인플레이션 부담과 이어지는 달러 약세 때문에 원자재 쪽으로 계속 돈이 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골드만삭스도 앞으로 6개월간 설탕을 제외한 모든 곡물(취급분 기준)이 계속 강세를 보일 것으로 내다봤다. 한편 글로벌 곡물 부족 현상이 가중되면서 미국산 저가 쌀의 수입을 저지하던 아시아 국가들이 도리어 미국에 손을 내밀고 있다. 공급자에게 매달리다시피 하는 것이다. 필리핀은 태국산 쌀 수입이 막히자 미국에 쌀 수입을 요청했고 이에 미국은 쌀을 수출하기로 했다. 아울러 필리핀은 3년 내 쌀을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연간 9억5,900만달러의 정부 예산을 책정해 관개수로 건설 등에 사용하기로 했지만 당장 수요를 충당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자산운용사인 델타글로벌어드바이스의 미첼 펜토 수석 시장전략가는 “원자재ㆍ곡물 등의 수요가 증가하는 데 비해 공급은 줄어드는 추세”라며 “당분간 가격이 강세를 띨 것”이라고 진단했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헤지 수요가 증가하는 점도 국제 상품 가격의 강세를 점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위스덤파이낸셜의 자카리 옥스맨 선임 트레이더는 “아직 원자재에 대한 글로벌 수요 감소는 감지되고 있지 않다”며 “특히 글로벌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팽배한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각종 원자재가 자산가치를 보호할 확실한 투자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