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9.11 테러 참사 현장이나 한국의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후 오래도록 혹은 평생 시달리는 정신적 외상의 고통을 알약으로 치료할 수 있을까.
워싱턴 포스트는 19일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망각의 알약'에 대한 연구가 진행중이며, 지금까지 연구 성과는 꽤 성공적이지만, 그만큼 이같은 망각요법의 부작용에 대한 논란도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도로에서 교통신호에 걸려 차를 세우고 있다가 차와 함께 납치당해수시간 동안 끌려다니면서 강간 위협을 받다 탈출에 성공했으나, 그 후에도 수년동안 이 끔찍한 기억의 악몽에 시달리고 정상적인 사회 생활이 어렵게 된 한 여성이이 연구의 피실험자로 자원한 사례를 들며 연구 현황과 논란을 소개했다.
이같이 개인적으로 충격적인 사건을 당한 사람 외에도 학살과 건물 붕괴, 대형교통사고 등 집단 참사 생존자, 베트남전 등 참전 군인 등은 대부분 끔찍한 경험 후불면, 악몽, 사회생활 부적응 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고 불리는 정신적장애에 시달린다.
현재 미국과 프랑스에서 진행되는 실험 결과들을 보면, 애초부터 고통스러운 기억이 정신적 장애를 가져올 만큼의 강도로 저장되지 않도록 막아주거나, 옛날 기억이 되살아날 때마다 복용하면 그 기억의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망각의 알약을 만드는게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연구에는 주로 협심증이나 부정맥 등 치료에 쓰이는 프로프라놀롤이라는 약이 사용되고 있는데, 연구자들은 연구 성과가 좋음에 따라 임상시험 규모를 확대하고, 실험약도 마리화나 성분을 포함해 다른 약제로 확대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감정적으로 고조된 순간에 경험한 일은, 나쁜 일 뿐 아니라 첫 키스라거나 `사랑한다'는 속삭임 같은 `작은' 사건들도 아드레날린이나 코르티솔과 같은 스트레스호르몬의 분비를 촉발하고, 이 호르몬이 뇌의 특정 부분을 활성화함으로써 더욱 생생한 기억을 남긴다.
프로프라놀롤이 이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의 작용을 막는 기능을 하는 것을 알게된 연구자들이 PTSD 방지에도 효과가 있는지 알아본 결과 교통사고 등 끔찍한 사고를 당한 후 이 약을 먹은 사람은 수개월 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PTSD의 증상이 덜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까지는 이 약이 기억 자체를 지우는 게 아니라 기억의 감정 촉발 효과를 둔화시키는 수준에서 연구가 이뤄지고 있지만, 일각에선 이보다 더 나아가 과거의 기억 효과를 아예 없애거나 지워버리는 효능을 찾는 연구을 추진하고 있다.
이 연구에 대한 찬성론자들은 PTSD에 시달리는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반대론자들은 "고통스러운 기억도 그 사람의 현재의 일부, 정체성의 일부"라며 이 약이 실제 개발.사용될 경우 사회윤리적 부작용을 우려하고 있다.
`직장 상사에게서 질책을 받은 뒤 망각의 알약을 먹고 자신감을 회복하는' 일은재미있는 예상 사례들이지만, "유대인 대학살과 같은 일을 직접 당하거나 목격한 사람들의 기억은 보존하는 게 사회윤리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PTSD는 다리 골절상처럼 의학적 장애의 하나"라며 "사회윤리적 측면의 우려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연구를 해선 안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반박하고 있다.
(워싱턴=연합뉴스) 윤동영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