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총리 지명자에 대한 국회의 임명동의안이 두 번이나 부결된 끝에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 10일 대법관 출신의 김석수씨를 다시 '총리서리'로 지명했다. 두 차례의 실패를 경험했으므로 이번만큼은 제대로 검증된 지명이기를 바라는 게 국민 모두의 마음일 것이다. 더이상 임명동의안이 부결된다면 나라의 체통에 손상이 갈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지난 두 차례의 국회 총리인사청문회에는 우리가 살아온 시대의 그늘이 투영돼 있다. 그 시대는 결과지상주의의 시대였다.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그것이 선(善)으로 간주됐다. 결과를 위해서는 위법이나 탈법도 그다지 문제될 게 없었다.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한다고 생각해서 자기도 따라 하다 보니 그것이 어느덧 관행처럼 돼버렸다. 총리 인사청문회는 그런 관행이라는 이름의 사회적 질병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만연돼 있는가를 보여줬다. 세번째 총리후보를 지명하면서 청와대는 인물 검증에 신중에 신중을 기한 것으로 전해졌다. 50여명의 인사가 검증 대상이었다고 하는데 상당수에서 문제가 발견됐다고 한다. '관행의 병'이 얼마나 중증인가를 재삼 확인해주는 우울한 삽화다. 이 같은 잘못된 관행들은 권위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부지불식간에 몸에 배게 됐다. 서양에서는 '명예에는 의무가 따르는(noblesse oblige)' 전통이 있는 데 반해 우리 사회에서는 명예나 권위를 '꿩 먹고 알도 먹는' 초법(超法)의 인증서쯤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총리 물망에 오를 정도라면 그들은 자기의 분야에서 권위를 구축하고 성공적인 삶을 산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의 성공의 이면이 비리의 흔적들로 얼룩져 있다면 그것은 시대의 불행이다. 자녀의 병역면제, 외국국적 취득이나 주민등록 위장전입 문제 등은 이 시대의 부모라면 한번쯤은 생각했을 것이고 개중에는 위법을 무릅쓴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남들이 다 하는데 나만 못하면 바보가 되는 듯한 기분에서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장상씨와 장대환씨 청문회에서 공통으로 드러난 것이 주민등록 위장전입이다. 장상씨는 재산을 늘려가는 과정에서, 장대환씨는 자녀의 강남학군 전학을 위해 위장전입한 사실이 밝혀졌다. 재산과 교육 목적의 위장전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이 나라에 과연 얼마나 될까. 이에 대해 장상씨는 자기가 알았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것처럼 시어머니가 한 일이라 모른다고 했다. 장대환씨는 맹모(孟母)를 갖다 대 변명했는데 맹모가 아들을 위해 하려고 했던 것은 저잣거리와 공동묘지를 피하는 것이었지 같은 도시 안의 학교를 차별한 것은 아니었다. 두 총리후보자나 그들을 향해 질타를 퍼붓는 국회의원이나 허위의식에 젖어 있기는 매한가지라는 느낌이었다. 국회 인사청문회는 그런 잘못된 관행들을 고쳐가는 과정 중의 하나다. 그런데 관행을 고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통령이 총리서리 임명 관행을 고집하는 것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다. 청와대의 그 같은 고집은 인사권은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라는 잘못된 관행에서 탈피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고 할 것이다.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라는 말 속에는 대통령이 알아서 행사하는 권한이니 섣불리 간섭하지 말라는 '제왕적' 대통령관이 담겨 있다. 국회 인사청문회는 대통령의 인사권에 대한 견제와 보완의 기능을 동시에 갖는다. 철저한 검증을 통해 능력과 자질이 최적인 사람을 총리에 앉히는 것이 제대로 된 인사권 행사다. 국회와의 협의를 통해 국회의 지지를 얻은 총리를 임명하는 것은 대통령의 국정수행에도 도움이 된다. 총리의 '궐위'가 사고로 인한 때만 대행체제를 시행할 수 있고 정상적인 인사에 의한 교체일 때는 대행체제를 시행할 수 없다는 궁색한 유권해석에 매달려 서리제를 주장하나 중요한 것은 궐위라는 사실 자체다. 청와대가 법에 있는 총리대행제를 외면하면서 법에 없는 총리서리제를 고집하는 것 또한 '관행의 병'이다.
논설위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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